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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성리학과 풍수의 도시,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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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성리학과 풍수의 도시, 서울

입력
2012.10.22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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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지리관념은 독특하다. 서울은 '주례고공기'를 바탕으로 계획된 중국의 낙양과 장안의 도시계획을 그대로 이어받기는 했지만 완전히 다르다. '주례고공기'의 법대로 좌묘우사(左廟右社: 궁궐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왕실 조상의 사당인 종묘를 놓고 오른쪽에는 사직단을 배치한다)에는 충실히 따랐지만 전조후시(前朝後市: 궁궐을 중심으로 앞쪽에는 정치를 행하는 관청을 놓고 뒤쪽에는 시가지를 형성한다)는 따르지 않았다. 산이 많아서다. 주변이 온통 산이다 보니 산의 맥을 따라 자연스럽게 관청과 시가가 나란히 궁궐 앞에 계획되었다. 한마디로 풍수지리에 입각한 도시계획이라고 할 수 있다. 궁궐의 위치도 서울의 서북쪽에 비딱하게 치우쳐 있다. 이렇게 되면 궁궐과 관청을 연결해 시가로 이어지는 남북축의 주작도로는 그 상징성이 눈에 띄게 약화된다. 차라리 상징성은 서대문에서 종로로 이어져 동대문에 닿는 동서축 길이 더 강하다.

이쯤에서 서울의 도시계획축을 놓고 삼봉 정도전과 무학이 벌인 논쟁을 다시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삼봉은 성리학으로 조선이라는 모더니티를 기획한 사람이다. 무학은 부처의 제자로 풍수지리에 밝았던 승려다. 삼봉의 주장은 앞에서 예를 든 '주례고공기'에 바탕해 서울을 남북축의 도로를 중심으로 시가지를 계획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학은 인왕산을 주산으로 궁궐을 앉히고 동서축의 도로를 중심으로 시가지를 짜나가자고 주장했다. 현대도시계획의 입장에서 보면 무학의 주장이 더 그럴듯하다. 청계천이 서울을 남북으로 가르고 있어 누가 봐도 동서축의 상징성이 더 강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서축의 상징성이 더 강력하다는 것이 과연 누가 할 주장이었는가 생각하면 고개가 갸웃거린다. 그것은 무학이 할 얘기가 아니라 오히려 삼봉이 할 얘기다.

또 있다. 기왕에 서울의 지형상 '전조후시'가 지켜지지 않는다면 궁궐-관청-시가의 순서가 바람직한 위계를 갖는다. 그렇다면 당연히 무학의 입지가 새로운 왕조의 위상과도 맞는다. 그러나 삼봉은 굳이 '주례고공기'의 예를 들어 남북축을 주장하며 좌묘우사의 원리는 적당히 맞추면서 전조후시의 원리를 아예 헝클어 놓았다. 그 결과 북악산과 인왕산 아래 궁궐과 관청, 주택들이 바글바글 모여있게 되었다. 결국 '주례고공기'는 서울의 도시계획의 명분으로만 남았을 뿐 제대로 적용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결국 부처의 제자인 무학이 왕권의 상징성을 돋보이는데 더 적극적이었고, 성리학자인 삼봉은 그런데 별 관심이 없었다는 얘기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삼봉은 킹메이커였다. 킹메이커가 정작 왕권을 강화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얘기다. 오히려 고려왕조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불가의 승려가 성리학을 지배이데올로기로 하는 새 왕조의 왕권을 강화하는 도시계획에 적극적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말하자면, 이성계는 왕이 되기 위해 성리학자인 삼봉을 이용했고, 삼봉은 이성계를 통해 성리학으로 꾸며지는 새 세상을 만들려고 했다. 이 동상이몽에 무학이 설 자리는 처음부터 없었다고 봐도 좋다. 삼봉의 입장에서는 종묘를 궁궐의 왼쪽에 앉히고, 사직단을 오른쪽에 앉히는 것도 힘들었을 것이다. 도대체 평지에서 적용되는 종묘와 사직의 위계가, 서쪽 인왕산에서 청계천의 평지로 내려 앉는 서울의 지형상 그 둘이 같은 위계를 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은 종묘가 목조건물로는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가장 긴 건물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 되었지만, 삼봉에게는 이 독특한 서울의 지형이 오히려 반가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삼봉이 기획한 조선의 모더니티는 왕권보다 신권이 먼저인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사직이 중요하지 종묘가 중요하지는 않았다. 성리학에서 왕은 그 다스림이 이치에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갈아 치울 수 있는 존재였다. 삼봉이 '주례고공기'의 도시계획적 원리를 주장하면서도 궁궐과 시가와 관청의 위계가 섞이는 현상을 받아들인 것은 조선이 왕의 나라가 아닌 성리학적 질서에 의한 엘리트의 나라가 되기를 기획했기 때문이었다. 풍수지리의 달인이었던 무학보다 더 풍수를 정치이데올로기에 적용할 줄 알았고, 유학 이데올로기를 기가 막히게 풍수에 적용한 성리학자 삼봉 정도전이 만든 도시, 그것이 서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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