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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 간첩단 사건, 입법부가 적극 나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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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 간첩단 사건, 입법부가 적극 나서야"

입력
2012.10.21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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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한국인 2세 김정사(57)씨는 지팡이 없인 걷지 못한다. 36년 전 육군 보안사령부 서빙고분실에서 받은 고문 이후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김씨는 서울대 법대 1학년이던 1977년 4월 '재일교포유학생간첩단사건'에 연루돼 체포됐다.

"4월 21일 아침 하숙집 앞에서 보안사 요원들에게 끌려갔습니다. 수사관들이 시인 김지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기에 철저한 민족주의자로 생각한다고 답했죠. 그러니 한 수사관이 '너는 악질이다. 이 정도 진술로는 죄가 되지 않는다'며 동료수사관에게 '전화기 가져와'라고 소리쳤죠. 전기고문이 시작됐습니다. 물고문에 구타로 정신을 잃기 일쑤였죠."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등 진보단체가 20일 '유신체제와 재일동포유학생 간첩단 사건의 진실과 의미'를 주제로 서울 정동 민주노총 교육원에서 연 학술행사에서 만난 김씨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고문을 이길 순 없었다"고 말했다.

77년 당시 보안사 조사관은 김씨에게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의 지령을 받고 국내에서 간첩 활동을 한 혐의를 인정하라고 했다. 김씨의 부인에 끔찍한 고문이 반복됐고, 김씨는 끝내 보안사 수사관이 만들어준 진술서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재판정에서 '판사님 저는 고문을 당했습니다'라고 호소했지만 재판장은 어떤 반응도 없었습니다. 1심에서 무기징역이, 2심에서 10년 형이 선고됐죠. 그래도 저는 운이 좋아 수감된 지 2년4개월 만에 석방될 수 있었어요. 일본에 있던 아버지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씨에게 6,000만엔을 주고 저를 빼낸 겁니다."

한민통은 1973년 박정희 유신체제에 반대해 미국ㆍ일본 등지에서 결성된 민주화운동 단체. 하지만 김씨 판결로 인해 반국가 이적단체가 됐다. 김씨 판결은 또 198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내란음모로 사형선고를 받게 되는 결정적 근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은 2004년, 김씨는 지난해 법원 재심을 통해 각각 무죄 선고를 받았다.

김씨는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겠다는 생각에서 한국 유학을 결심했다. 1970년대 일본에서는 자이니치(재일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극에 달했기 때문에 김씨처럼 한국 유학을 선택하는 재일교포 청년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들은 고국에서도 환영 받지 못했다. 70~80년대 재일동포 간첩사건에 엮여 억울한 옥살이를 한 재일동포가 11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는 "재일교포 피해자 중 법원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된 사람은 7명, 재판이 계류 중이거나 재심 개시 결정이 난 사람은 11명으로 그나마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없어지면서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재심 청구조차 힘들어졌다"며 "법원 판결에만 역사청산을 맡길 게 아니라 입법부가 과거사문제 해결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동현기자 nan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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