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암기과목 교과서 이후, 이렇게 열심히 줄을 그어가며 읽었던 책은 또 없었다. 20세기 최고의 전기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1881~1942)가 쓴 에는 600쪽 넘는 책장(冊張) 구석구석마다 읽는 이의 무릎을 치게 만드는 보석 같은 명문이 그득하다.
프랑스 소설가 오노레 드 발자크(1799~1850)의 외모에 관한 묘사는 더없이 적확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친다. "그에게 푸른 앞치마를 둘러주고 남프랑스 어떤 술집 판매대 뒤에 세워놓고 보면 이 선량하고 쾌활한 남자를, 손님에게 술을 따라주면서 그들과 유쾌하게 지껄여대는 글도 못 읽는 술집주인과 구별할 수 없을 것이다."
츠바이크의 문장은 인간의 내면을 파고들 때 더없이 날카로워진다. "부유함과 안락함 속에서 남편과 함께 살면서, 희생이라고는 조금도 해보지 않은 여자가, 쫓기고 몰리고 영원한 작업과 작업의 무아경 속에서 비틀거리는 예술가에게 성적으로는 수도승처럼 살고, 물질적으로는 우체국 직원처럼 살면서 긴장도 풀지 말고, 사치도 모험도 하지 말며 그저 쓰고 쓰고 또 쓰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발자크의 유부녀 애인이 얄팍한 사랑을 미끼로 그의 재능을 이용하는 부분에 등장한다.
문장에 마침표를 찍기보다 쉼표로 이어가길 즐기는 츠바이크의 만연체 미문은 독일어와 한국어 사이에 놓인 번역의 장막을 뚫고 강렬한 빛을 발한다. 발자크가 작가로서 경험한 성공과 좌절, 돈 몇 푼에 잡문을 써야 했던 생활인으로서의 비루함, 남의 아내를 사랑하는 남자로서 맛봐야 했던 희열과 열패감, 이런 오욕(五慾)과 칠정(七情)이 츠바이크 문장을 통해 강한 생명력을 부여받는다.
발자크는 츠바이크의 글을 통해 다시 태어나지만, 대신 그의 인격은 츠바이크의 날선 글에 낱낱이 해부된다. 때론 폭풍처럼 몰아치고 때론 햇살처럼 어두운 내면을 밝히는 츠바이크의 묘사는 발자크의 심리를 발가벗기고, 독자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츠바이크는 인물에 대한 자의적 해석을 내리지만 결코 어설픈 단정은 아니다. 츠바이크의 인문학적 지식, 인간 심리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결합된 과학적 해석에 가깝다. 그는 당대 유럽에서 가장 많은 서적을 보유한 장서가 중 한 명이었다. 풍부한 사료와 서신을 바탕으로 20세기 초반 오스트리아의 작가는 100년을 먼저 살았던 프랑스 대문호의 아름답지 못한 사생활과 어두운 내면까지 세밀하게 밝혀 낸다. 또 발자크가 남긴 텍스트를 철저히 분석해, 작품 속에 녹아든 발자크의 심리를 용케도 추출해 낸다.
어찌 보면 그의 전기는 문학이라기보다, 한 나약한 인간의 얼굴에 새겨진 깊은 주름과 굴곡, 작은 생채기 하나까지 낱낱이 그려낸 초정밀 초상화다. 그래서 다른 전기에 비해 이 발자크 평전은 디테일을 음미하며 읽어야 한다. 보통의 전기는 글의 대상이 되는 위인(또는 악인)의 모습을 주로 염두에 두고 읽어 내려가야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은 발자크의 모습 위에, 수많은 문헌을 쌓아두고 서재에서 씨름하는 츠바이크의 모습이 고스란히 포개진다. 그래서 책의 제목은 그냥 이 아닌 이다.
혹시 츠바이크가 차린 문장의 성찬을 좀 더 맛보고자 한다면 그의 또 다른 평전 를 추천한다. 호색한 카사노바의 정체를 소개하는 초반부가 압권이다. 남성 작가가 남자 주인공의 외모를 묘사한 문장이지만 팽팽한 성적 긴장감이 느껴진다. 츠바이크가 생전에 완성한 유일한 장편소설 도 수작이다. 허례, 연민, 동정심과 같은 허울 속에 숨어 꿈틀거리는 인간의 본질적 이기심을 불편할 정도로 세밀하게 그려낸 심리소설이다.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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