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은 대한민국 사법 사상 가장 뜨거운 진실 공방이 벌어진 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 대법원이 19일 재심을 결정함에 따라 1992년 강씨에 대해 유죄 확정 판결이 내려진 이후 20년 만에, 치열했던 진실 공방이 다시 한 번 법정에서 시작되게 됐다.
법조계에서는 이 사건을 재심이 결정될 경우 무죄로 판결이 뒤바뀔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법원이 내린 형사사건의 재심 판결은 무죄로 결론이 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지금까지 새롭게 드러난 증거를 볼 때 과거 강씨에게 유죄를 선고한 법원의 판단이 뒤집힐 개연성이 크기 때문이다.
1992년 7월 대법원이 강씨에게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했을 때 핵심 쟁점은 사망한 김기설씨의 유서가 본인이 작성한 것인지, 강씨의 것인지 여부였다. 법원은 '강씨의 필적이 맞다'는 검찰이 제시한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김형영 실장의 필적감정을 받아들여 강씨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2007년 11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이 같은 핵심 증거를 뒤집는 조사 결과를 내놓았다. 김기설씨의 노트와 낙서에 대한 7곳의 사설 감정기관 감정과 국과수 재감정을 통해 유서가 김기설씨의 필체임을 증명한 것으로, 이로써 강씨에 대한 유죄 판단의 핵심 근거가 허위임이 드러났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2009년 서울고법이 "유죄 확정 판결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고도의 개연성이 인정된다"고 재심 개시 결정 사유를 밝힌 점도 이 같은 전망에 힘을 실었다.
따라서 이날 대법원의 재심 결정 이유는 예상 밖이었다는 해석이다. 검찰이 2009년 서울고법의 재심 개시 결정에 반발해 즉시 항고를 한 이후 3년 동안 대법원은 결정을 내리지 못했지만, 진실화해위가 내놓은 새로운 증거 등을 볼 때 서울고법의 판단을 받아들여 사실상 무죄 취지의 결정을 내릴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았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날 "진실화해위의 조사 등으로 드러난 새로운 증거자료가 재심 대상판결 부분에 관해 무죄를 인정할 명백한 증거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재심을 개시해야 한다는 결정은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않은 잘못이 있다"고 밝혔다. 국과수의 재감정 결과에 근거한 진실화해위의 조사 결과에 대해서도 "김기설의 필적이라는 예단의 영향 아래 대부분의 감정이 진행된 것으로 의심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는 핵심 증거가 뒤바뀌어 무죄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재심을 해야 한다는 서울고법의 판단은 잘못된 것으로 김씨의 필적감정 결과를 다시 판단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일각에서는 대법원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 사건을 재심 재판부로 하여금 판단을 내리도록 사실상 미룬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서울고법의 한 부장판사는 "언뜻 보기에는 간단한 것으로 보이지만, 결정 이후의 파장 등을 고려할 때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었던 대법원이 심사숙고를 한 결과인 것 같다"고 말했다.
결국 김씨의 필체가 본인의 것인지, 아니면 강씨의 것인지, 만약 강씨의 것이라면 강씨가 김씨의 자살을 방조한 것인지에 대한 최종 판단이 내려질 서울고법의 재판부에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게 됐다.
남상욱기자 thoth@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