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인 1931년 북녘 땅 경기 개풍에서 태어나 개화 세대의 질곡을 온몸으로 겪었다. 1950년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6ㆍ25동란으로 중퇴한 뒤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1970년 40세의 늦깎이로 등단하여 데뷔작 을 비롯한 많은 작품을 남겼다. 뼈아픈 전란의 경험과 아들을 먼저 보내는 참척을 당하는 등 온갖 간난신고 가운데서도 인생 말년 80세까지 소설을 썼다. 우리 모두가 아끼고 사랑하던 작가 박완서 선생의 이야기다.
거친 삶의 체험이 있다고 해서 누구나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고, 설혹 쓴다고 해도 누구나 소설을 통해 결이 고운 인간애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박완서 선생의 품성이기에 가능했던 대목이 있다. 그 체험의 신산함에 비추어 볼 때, 아마도 선생이 소설을 쓰지 않았더라면 우울증이나 강박신경증을 벗어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나 해맑은 미소가 대언하는 소녀 같은 마음으로, 선생은 큰 문학상을 받거나 과외의 수입이 생길 때마다 이를 사회단체에 기부하곤 했다.
별세한 후에는 고인의 유지로 유산 13억 원을 모교에 기부했다. 모교에서는 '박완서 기금 연구 펠로우'를 만들어, 국내 대학의 모든 신진 인문학 연구자들에게 지원을 개방하기로 했다. 매년 1명을 선정, 연 3,000만원의 연구비를 주기로 한 것은 문학상을 만들어 상금을 주는 것보다 훨씬 더 뜻이 깊어 보인다. 국내에 문학상은 세계적 수준으로 많으나, 인문학 지원은 그에 훨씬 못 미치기 때문이다. 또 거기에는 인문정신을 삶의 근간으로 삼았던 작가의 시각이 배어있기도 하다.
21세기 들어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공공연히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고, 시대의 흐름으로 보아 이를 치유할 방략이 마련되기 어렵다는 분위기였다. 문자문화 활자매체가 급격히 영상문화 전자매체로 대치되면서,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을 뿐 아니라 종이신문도 온전히 설 자리를 찾기 어렵게 될 것이라고 했다. 사실 그렇다. 그와 같은 우울한 전망은 지금도 여전히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인문학 스스로 낡은 전통의 겉옷을 벗어버리고 다시 탐색할 새로운 길이 없는 것도 아니다.
모든 학문이 다 그러하지만, 인문학은 지식의 축적과 정보의 소통에 의존하는 분야이다. 특히 앞으로의 세대에 있어서는 정확하고 순발력 있는 정보의 확보가 생명력을 강화하는 관건이 될 터이다. 종이책과 전자책을 고대 골품제의 성골과 육두품처럼 구분하지 않고, 오히려 앞서서 그 전방지점을 탐색해 나간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다. 인문학의 응용에 있어서도 지난날 사람들을 가르치기만 하던 수직적 관계로부터 사람들과 함께 공감하고 즐거워하는 수평적 관계로 바꿔 볼 수 있다.
기실 여기에는 만만찮은 인식과 태도의 변화가 요구된다. 작가와 독자, 지식 창출자와 수용자, 문화 생산자와 소비자의 위상이 서로 교차될 수 있다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주체와 타자의 고정된 좌표에 관해 오랫동안 형성되어 온 고정관념을 과감히 뛰어 넘는 용기가 수반되어야 한다. 그러한 점에서 국내의 한 대학이 노숙인과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실천인문학 강좌를 열고, 또 '후마니타스 칼리지'란 이름으로 인문학 위주의 전문 교양강의들을 개설하여 대학교육을 개혁한 것은 참으로 주목할 만한 일이다.
지식의 상아탑이라 불리는 대학이 국내외 언론사들의 물리적 순위 평가 등에 휘둘리지 않고, 독자적인 교육과 실천의 방안을 찾아 나가는 것이 중요한 시기이다. 오래되어 익숙한 자기방어적 인문학이 아니라, 사회현실과 융합하고 통섭하며 전방위적 문화 소통이 가능한 인문학으로 눈을 돌려야 할 때다. 위기의 인문학을 창의적인 인문학으로, 고사 지경에 내몰려 거리의 부랑아가 될 수도 있는 인문학을 인류 미래의 선도자로 끌어올리는 일이다.
근대 서구의 인문주의는 르네상스기 이탈리아에서 일어나 유럽과 세계로 확대되었으며, 그 바탕에 있는 고전적 이상으로 현세적 인간성을 앙양하는 것이 목표였다. 장구한 역사를 가진 이 정신운동의 핵심은 언제나 '인간'이었고, 이는 동양 문화권에서도 마찬가지다. 왜, 화향(花香) 백리, 주향(酒香) 천리, 인향(人香) 만리라고 하지 않던가. 박완서 선생이 자기 생애의 교훈과 남긴 유산을 쾌척하면서 새롭게 살려내기를 요청한, 인간이 살아 있는 새로운 문화연구로서의 인문학도 바로 그 연장선상에 있다.
김종회 경희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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