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55년을 앞두고 있다. 나에게는 오로지 현재가 내 꿈의 장소이다. 허나 현재란, 꿈이란 얼마나 천년의 가설인가"
고은 시인(79)이 등단 55년을 기념하는 시선집 을 냈다. 시인이 평생에 걸쳐 쓴 작품들 중 240편을 가려 뽑은 명시선이다. 149편은 2002년 낸 첫 시선집 에서 추렸고 에 실려 있지 않지만, 2002년 이전에 쓴 시 50여 편과 이후에 쓴 30여 편도 추가됐다. '백두산' '만인보' '머나먼 길' 등의 서사시와 장시는 선정대상에서 제외했다.
고은의 초기 시는 탐미적, 허무주의적 색채가 짙었는데, 1970~80년대를 거치며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발언으로 시 세계가 바뀐다. 1부에서는 '시로 쓴 한민족의 호적부'라 일컬어지는 '만인보'를 완성한 고은이 지금과는 또 어떤 차별적인 지점에서 시인으로 출발했는지를 읽을 수 있다.
'누님이 와서 이마 맡에 앉고/외로운 파스·하이드라지드 병(甁) 속에/들어 있는 정서(情緖)를 보고 있다./뜨락의 목련(木蓮)이 쪼개어지고 있다./한번의 긴 숨이 창 너머 하늘로 삭아가버린다./오늘, 슬픈 하루의 오후에도/늑골에서 두근거리는 신(神)이/어딘가의 머나먼 곳으로 간다.' ('폐결핵' 부분)
이 시기 민주화운동의 중심에 섰던 고은 시인의 생각도 엿볼 수 있다. 이는 이후로도 고은 시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다.
'별 하나 우러러보며 젊자/어둠속에서/내 자식들의 초롱초롱한 가슴이자/내 가슴으로/한밤중 몇백광년의 조국이자/아무리 멍든 몸으로 쓰러질지라도/지금 진리에 가장 가까운 건 젊은이다/땅 위의 모든 이들아 젊자' ('조국의 별' 부분)
이밖에 3, 4부에서는 선적 깨달음의 순간을 잡아낸 시어, 해외에서 경험을 녹여낸 시편 등 우주로 뻗어있는 고은의 시 세계가 담겨 있다. 최근작을 모은 5부에는 사랑 시집인 과 시력 50년을 넘은 자신의 시적 본류를 다시 탐구하는 의 대표작이 실렸다.
시선집은 이시영 김승희 고형렬 안도현 박성우 등 다섯 시인이 시기별로 나누어 수록작을 뽑고 문학평론가 백낙청 씨가 최종 선정했다. 시인의 개고(改稿)를 거치지 않은 작품을 수록해 고은 시의 변화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