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던지는 마지막 충고마르크스 사상 형성과 발전과정 짚고 역사적 맥락과 상호작용 탐구버나드 쇼·입센·에밀 졸라·모파상 등 문화·예술 사회에도 지대한 영향세계화한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 속 인류의 미래를 숙고하기 위해마르크스의 현재적 의미 물어
소련과 동유럽의 소비에트 블록이 붕괴하자 티나(TINA)가 돌아왔다. '대안은 없다' 는 뜻의 영어 문장(There is no alternative)에서 따온 이 이름은 '공산주의는 끝났고 자본주의만이 길'이라는 환호성이다. '철의 여인'으로 불리며 1980년대 보수당 정권을 이끈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가 자주 호명했던 이름이기도 하다. 티나가 활보하는 사이 마르크스(1818~1883)는 퇴물이 되었다.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로 자본주의의 한계가 뚜렷이 드러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소비에트 몰락에 멘붕을 겪은 좌파뿐 아니라 '자본주의 만세'를 외치던 시장 근본주의자들조차 마르크스를 찾기 시작했다. '쿠오 바디스?(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질문에 좌파도 우파도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는 상황에서 마르크스의 혜안이 새삼 유효해졌기 때문이다.
"진지하게 마르크스를 고민할 때가 다시 돌아왔다."
이달 1일 타계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1917~2012)의 마지막 저작인 는 이 문장으로 끝난다. 마르크스(엥겔스도 당연히 포함된다)의 생각이 어떻게 발전했고 후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연구한 책이다. 1056년부터 2009년까지 쓴 논문 15편을 모았다. 원서는 지난해 초 출간됐다.
홉스봄은 '20세기가 낳은 가장 위대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로 꼽힌다. 80년 간의 공산주의 실험이 실패로 돌아간 뒤에도 지지를 철회하지 않아 '고집 센 공산주의자'라는 말을 들었던 그는, 이 책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역사적 맥락과 어떻게 상호작용을 주고 받으면서 발전했는지 포괄적으로 밝히는 데 주력하고 있다.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라는 제목은 '21세기에 마르크스가 시사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짝을 이루며 마르크스의 현재적 의미를 묻는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마르크스가 생전에 제시한 사상과 이념을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주요 저작을 중심으로 고찰한 것이고, 2부는 마르크스 당대와 사후 그의 사상에 대한 반응과 역사적 발전 과정에 관한 것이다.
홉스봄은 엥겔스가 쓴 부터 마르크스의 과 , 마르크스주의 정치이론을 개척한 20세기 마르크스주의자 그람시의 에 이르기까지 핵심적인 저술들을 조사해 마르크스 사상의 형성과 발전 과정을 탐구한다. 엥겔스의 를 다룬 것은 이 책이 마르크스주의 방법론을 구체적 사회 연구에 적용한 최초의 대규모 시도이기 때문이다. 그람시에 대해서는 2개 장을 할애해 자세히 분석했다.
마르크스 사후 그의 사상이 어떻게 받아들여졌고 실제 역사의 지평에서 어떤 실천으로 전개됐는지 탐구한 2부는 파란만장한 연대기다. 마르크스 당대인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 나온 비판론부터 20세기 정치ㆍ사회ㆍ문화의 여러 영역에서 마르크스 사상이 미친 영향을 거쳐 마르크스주의가 퇴조하는 20세기의 마지막 20년까지 다루고, 미래의 마르크스를 생각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20세기 역사에서 마르크스 사상의 자기장을 파악하는 홉스봄의 시선은 전세계에 가 닿는다. 문화와 예술, 지식인 사회에서 마르크스가 차지한 위상과, 사회주의운동이나 정당과 체제에 미친 영향을 분석했다. 이 과정에서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의 중요성과 역할이 얼마나 컸는지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특히 파시즘이 전세계를 위협하던 시기인 1929~1945년 마르크스주의를 둘러싼 문화적 풍경은 읽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파시즘 반대는 곧 마르크스주의로 통했던 당시는 미국의 백만장자 집안 엘리트들조차 공산주의에 매혹되고 반파시즘의 국제 연대가 형성됐다. 이 시기 지식인 사회의 특징을 홉스봄은 '인텔리겐차의 민주화'라고 부른다. 엘리트가 멸시하던 2류 지식인들조차 포괄해 반파시즘 연대가 이뤄졌음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보다 앞서 19세기 말 20세기 초 마르크스 사상의 영향권에서는 극작가 버나드 쇼, 공예미술가 윌리엄 모리스, 스칸디나비아 문학의 입센과 스트린드베리, 프랑스 자연주의 소설의 에밀 졸라와 모파상 등 여러 이름을 만나게 된다.
홉스봄은 말한다. "20세기에 지울 수 없는 주요한 흔적을 남긴 단 한 명의 사상가를 꼽는다면, 그는 바로 마르크스다"라고. 더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가 여전히 유효하며 열려 있는 미래라는 사실이다. 홉스봄은 "마르크스는 21세기를 위해 다시 한 번 너무나 필요한 사상가"라고 강조하며 두 가지 이유를 댄다. 첫째, 현실 공산주의가 붕괴함에 따라 마르크스를 레닌주의나 레닌주의체제와 동일시하던 데서 자유로워졌다. 둘째, 1990년대 이후 등장한 세계화한 자본주의 체제가 마르크스가 에서 예견한 세계와 결정적인 측면에서 무시무시할 정도로 똑같다.
지금도 전세계 인구의 20%가 넘는 사람들이 마르크스 사상에 기반한 체제에서 살고 있다. 홉스봄은 인류의 미래를 숙고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이 책을 썼다.
오미환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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