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프 바이든 미국 부통령은 1988년 대선 경선 때 민주당의 선두 주자였다. 그런 그가 87년 유세에서 영국 노동당 당수 키녹스의 연설을 제대로 인용하지 않고 도용했다는 이유로 낙마했다. 얼마 전까지 국회의원을 지낸 한 인사는 자신의 저서에서 바이든의 이런 소개하면서 우리 국회는 아니면 말고 식의 상식을 벗어난 주장을 하거나 사실에 근거하지 않거나 왜곡을 해도 정치적 대가를 치르지 않는 정치적 구조를 갖고 있음을 개탄했다.
정문헌 새누리당 의원은 8일 통일부 국정감사에서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단독회담에서 북방한계선(NLL)을 주장하지 않겠다는 취지의 발언이 담긴 '비공개 대화록'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정 의원은 또 "당시 회담내용은 녹음됐고 북한의 통일전선부는 녹취된 대화록이 비밀 합의사항이라며 우리 측 비선라인과 공유했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대선 정국에 큰 파문을 일으키면서 일주일이 지난 지금에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새누리당은 국정조사를 요구하고 민주통합당은 정의원을 '사자에 대한 명예훼손'과 '공무상비밀누설죄'로 고발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이 논란은 애초 비공개 대화록의 존재 유무에서 북방한계선에 대한 당시 정부의 입장이 무엇이었나로 문제의 초점이 바뀌고 있다.
남북정상회담의 대화록을 공개하라는 것은 남북관계의 특수 상황에 비춰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 이는 남북관계의 미래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어떤 나라도 국익을 위해 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하지 않는다. 국제적 관례에도 맞지 않는 일이다. 국회의원이 면책특권을 이용해 일방적으로 이것이 대화내용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다. 그래서 우리의 정치가, 정치인이, 나아가 정당이 바뀌어야 질 높은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지금 대통령 후보 모두가 남북 관계를 풀자는 것을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하지 말아야 할 대화록 공개를 하자고 국정조사까지 한다면 이는 누가 대통령에 당선되든 차기 정부는 통일 정책이니 남북정상회담이니 하는 것을 아예 하지 말자는 얘기나 다름없다. 1972년 7ㆍ4공동성명의 주역인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당시의 일들을 무덤까지 갖고 갔다. 한치 앞도 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남북정상회담을 비밀리에 추진했다가 북으로부터 망신만 당한 일을 이렇게 풀어서는 안 된다. 이명박 대통령을 위해서도 박근혜 후보를 위해서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미국의 사례를 한번 보자. 7ㆍ4 공동성명의 배경이 되었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그해 2월에 열린 닉슨과 마오쩌둥간의 정상회담이었다. 그리고 닉슨은 저우언라이와 함께 '상하이 공동성명'을 발표한다.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지만 이 역사적인 만남에서 두 사람이 나눈 대화가 공개됐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 몇 년 전에 이 공동성명 발표 무렵의 긴박한 순간을 기록한 책이 나왔다. 거기에는 양측 보좌진의 긴박한 막후 협상 과정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공동성명에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성명이 채택된 후 찬성하는 쪽도 반대하는 쪽도 협상 과정의 디테일에 대해서는 입을 닫았다. 상대를 탓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상하이 공동성명이 제 역할을 할 수 있었고 미국은 중국과의 관계개선으로 소련을 제압할 수 있었다. 이것이 역사의 평가이다.
알다시피 정전협정은 해상에서의 경계선을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고 있다. 1992년에 합의된 불가침 부속합의서에서 "남과 북의 해상 불가침 경계선은 앞으로 계속 협의한다. 해상불가침 구역은 해상불가침 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 쌍방이 지금까지 관할하여 온 구역으로 한다"고 합의했다. 서해에서의 무력충돌 방지는 시급한 과제이다. 그러려면 이 합의를 토대로 서해에서의 평화협력 방안이 논의돼야 한다. 북방한계선을 유지하지 않고서는 평화도, 협력도 불가능한 구조이다. 공동어로수역이나 평화협력지대도 마찬가지다.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이 정치색 짙은 논란은 이제 멈춰야한다.
이봉조 극동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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