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은행들을 자금 세탁 경로로 삼고, 미국은행 수십 곳에서 최소 수 백 억원대 사기대출을 받아 가로챈 국제금융사기 조직이 적발됐다. 나이지리아인이 주범으로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태국 등 최소 6개국이 자금 인출과 세탁에 이용된 것으로 한미 수사 당국은 추정하고 있다.
경찰청 사이버테러대응센터는 미국 시중은행 고객명의를 도용해 대출을 받은 뒤 국내 은행 계좌로 이체시켜 가로챈 나이지리아인 온나쿠아(39), 추쿠에케(40)씨와 한국인 장모(36), 권모(33)씨 4명을 붙잡아 구속했다고 17일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은 대출을 담당한 미국 내의 또 다른 조직과 공조, 희대의 국제 금융사기행각을 벌였다. 미국 은행의 고객정보를 해킹, 마치 그 고객이 주택담보 대출을 받는 것처럼 허위서류를 꾸며 은행에 팩스로 보낸 뒤 본인의 신원 정보를 묻는 은행의 전화를 보이스피싱으로 착신시켜 고객 본인행세를 해 승인을 받았다. 미국 은행이 우리와 달리 팩스신청과 전화확인만으로도 대출을 해주는 점을 노린 것이다.
이렇게 대출 받은 돈은 한국의 은행 계좌 50곳으로 이체된 뒤 인출됐다. 국내에서 인출된 금액은 지난해 1월부터 올 7월까지 68건에 미화 1,100만달러(한화 122억여원)다. 일본 등 다른 5개국에서도 인출된 것으로 확인돼 피해규모는 훨씬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피해를 입은 미국은행도 BOA, 뱅크오브오리엔트 등 39곳에 이른다.
미국은행들의 신고로 수사에 착수한 미 연방수사국(FBI)은 지난해 8월 우리 경찰에 공조를 요청했다. 정석화 사이버테러대응센터 수사실장은 "다른 나라에 비해 우리나라 은행이 해외 송금 절차가 빠르다는 점을 노린 것 같다"며 "미국, 한국 등 여러 나라에 점조직을 두고 사기를 벌인 일당은 처음 본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 국제금융사기 조직의 우두머리가 나이지리아인 A(42)씨로 보고 있다. 그는 지난해 10월 우리나라를 빠져나갔다. A씨는 이태원에서 환전업을 하던 장씨를 끌어들여 수금총책을 맡긴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내 인출계좌 명의자인 강모(32)씨 등 한국인 8명은 돈을 받아 전달해 주고 인출 건당 얼마씩 수수료를 받는 조건으로 가담했다. 이들은 위조 송장이나 수출계약서를 은행에 제출하고 인출했다. 경찰은 이들 8명도 불구속 입건했다. 미국 내 대출조직은 FBI가 수사를 벌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 실장은 "나이지리아와 한국인들이 모두 A씨의 지시를 받았지만, 이들은 서로를 알지 못했고 모두 '대포폰'을 썼다"며 "경찰 조사에서도 A씨에 대한 정보나 자금세탁 과정, 등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어 이 돈이 어느 나라로 빠져나갔는지 수사에 애를 먹고 있다"고 말했다. 경찰은 A씨에 대해 인터폴을 통해 국제 수배를 요청했다.
김지은기자 lun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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