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저녁 사우디아라비아 남서부 도시 아브하의 한 창고에 20~40대 남성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차를 멀찍이 세우고 주변을 둘러보며 걸어오는 등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60여명이 도착하자 창고 문이 닫히고 빗장이 걸렸다. 창고 안은 적막에 휩싸였다. 하지만 불이 꺼지고 영사기가 돌아가고 한쪽 벽에 걸린 흰 천에 어렴풋이 형상이 나타나자 사람들의 긴장감은 설렘으로 바뀌었다. 이 행사는 영화관이 없고 공적 장소에서 영화 상영을 할 수 없는 사우디의 엄격한 문화 통제에 저항하는 비밀 영화 상영회다.
세계에서 가장 보수적인 이슬람 국가인 사우디에서는 부도덕하다는 이유로 영화 상영이 금지돼 있지만 최근 이에 반대하는 비밀 영화 상영회가 확산되고 있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이 15일 전했다. 영화 감독 5명이 만든 단체 레드왁스가 자신들의 영화를 선보이기 위해 11일에 연 첫 상영회가 그 예다. 상영회에서는 여성의 권리, 이주노동자의 삶, 도시화 등 정치·사회적 쟁점을 다룬 작품들이 공개됐고 영화 내용에 대한 토론도 이어졌다.
상영회 개최는 첩보전과 같았다. 학생과 작가, 예술가 등 소수의 젊은 남성만 초청됐고 장소는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로 고지했다. 레드왁스의 한 감독은 "경찰이 들이닥쳐 우리를 체포할 경우 손쓸 도리가 없었기 때문에 모두 두려워했다"고 말했다.
사우디에서는 텔레비전을 국내에 들여왔다는 이유로 비판 받았던 파이잘 이븐 아브 알아지즈 국왕이 암살된 후 모든 영화관이 폐쇄됐다. 보수주의자들이 문화적 행위가 이슬람 가치에 반한다는 목소리를 높였기 때문이다. 2009년에는 영화관을 금지하는 종교 칙령이 내려졌다.
사우디 국민의 영화 관람 욕구는 높아져 왔다. 한 영화 감독은 "사우디인들은 단지 영화를 보기 위해 주말마다 이웃 바레인, 두바이를 방문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2, 3달러에 거래되는 해적판 DVD와 파일 공유 사이트도 인기가 높다. 하지만 사우디 당국은 지난해 유튜브에 수도 리야드의 빈곤 문제를 다룬 동영상을 올린 영화 감독을 체포하는 등 영화 유통 통로의 단속을 강화하고 있다.
사우디 영화 감독 하이파 알만수르는 "비밀 영화 상영회는 사우디인들 사이에 표현의 자유에 대한 열망이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박우진기자 panorama@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