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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 현금인출기서 돈 찾아 베팅… 허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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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 현금인출기서 돈 찾아 베팅… 허공으로

입력
2012.10.15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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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노ㆍ경마ㆍ경정ㆍ경륜 등 합법화된 4대 사행산업의 매출액은 지난해 13조3,362억원. 매년 사상 최고액을 경신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행게임 중독이 늘어남에 따라 가정파탄 이혼 자살 등 각종 폐해가 속출하고 있지만 정작 이를 완화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는 미비하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도박에 뛰어들고, 또 이를 부추기거나 방조하는 구조적 문제를 2회에 걸쳐 들여다본다.

6일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의 3호선 마두역. 이 곳은 반경 1km 이내에 22개 아파트 단지에 5만 명 넘는 인구가 살고 있는 대단위 아파트 단지 지역이다. 그런데 바로 마두역 옆에 국민체육진흥공단의 경륜ㆍ경정 장외발매소인 '스피존'이 있다. 이 날 오후 수 백 명이 모니터에 넋을 잃은 채 '달려, 달려'를 외치는 가운데 유독 한 중년 여성은 게임에 흥미 없다는 듯 멍하니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불과 10분 거리인 장항동에 산다는 주부 이모(54)씨는 도박으로 1억원 가까이 날리고 남편과 별거 중이라고 했다. 그는 "처음 동네 아줌마들끼리 고스톱 치다 구경 삼아 가보자 해서 온 게 벌써 10년째 출근 도장을 찍고 있다"며 "집 바로 앞에 이런 게 있으니 수ㆍ목엔 경정, 금ㆍ토ㆍ일엔 경륜을 나눠서 하니깐 주 5일을 도박에 빠져 산다"고 했다. 그는 "도박중독 치료도, 상담도 받고 했지만 습관적으로 이 곳으로 온다"며 "이 중에는 이 주변에 사는 아줌마들이 꽤 된다"고 전했다. 발매소 반경 1㎞ 이내 22개 아파트 단지에 약 5만 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이곳에서 지하철로 한 정거장, 버스로 10분 거리에는 한국마사회장외발매소(KRA 플라자) 일산지점이 있다. 인근 마두동에 사는 이모(48)씨는 "집에서 걸어서 20분 걸리다 보니 남편과 산책하듯 종종 주말에 찾는다"며 "보통 20만원 정도 쓰고 가지만 100만원 넘게 잃은 적도 있다"고 말했다.

과천경마장을 비롯해 서울 및 인근 지역에 있는 정식 경기장과 장외 발매소 만도 31곳. 특히 이들 상당수는 대규모 인구가 사는 주택 단지나 유동 인구가 많은 지하철 역 인근에 위치해 있다. 이해국 가톨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거주지 주변에 도박장이 있으면 면담이나 약물치료 등 아무리 본인 스스로 조절하려고 해도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며 "사회가 접근을 통제하는 장치를 마련하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발매소 내부에도 도박을 조장하는 여러 요소들이 도사리고 있다. 바로 현금인출기다. 서울 영등포 역 근처 고시원에 사는 일용직 건설노동자 임모(51)씨는 이날 2주 동안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받은 100만원 중 90만원을 잃었다고 했다. 생활비 10만원만 남긴 채 밖으로 나서던 임씨는 "집을 나설 때마다 '가져간 현금 25만원만 하자'고 맘 먹지만 층층마다 현금인출기가 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돈을 더 뽑게 된다"며 "현금인출기를 건물 밖에 두면 귀찮아서라도 돈을 더 인출하지 않았겠지만 어쨌든 내 잘못"이라고 후회했다.

임씨처럼 경마, 경륜, 경정 경기장을 찾는 이들은 곳곳에 널려 있는 현금인출기가 베팅을 부추긴다는 지적이 많다. 실제 농협중앙회가 국회 농림수산식품위원회 소속 새누리당 윤명희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올 9월까지 경마가 열리는 금ㆍ토ㆍ일요일 KRA플라자 영등포지점에 설치된 농협 현금인출기 21대에서 하루 평균 대당 인출 건수(161건)와 금액(4,580만원)은 인근 농협 영등포지점 인출기 6대의 대당 인출 건수(84건)와 금액(2,357만원)의 갑절 수준이다. 총액으로 따지면 KRA플라자가 9억6,192만원으로 영등포지점(1억4,146만원)의 약 7배다. 게다가 경기 과천경마장 출입구에도 지난해에는 없던 인출기가 올 여름에 설치되는 등 전국 31개 장외발매소에 인출기 수 백대가 설치된 것으로 알려졌다. 호주의 퀸즈랜드 주(洲) 같은 곳에서는 '지정된 도박장 내 가까운 곳이나 출입구에 자동현금인출기를 설치하지 못한다'고 규제하고 있지만 우리는 도박을 부추기듯 마구 풀어주고 있는 실정이다.

그나마 새누리당 박인숙 의원이 "사행행위의 중독성을 높이는 원인"이라며 지난달 장외발매소 내 현금인출기 설치를 금지하는 내용 등을 담은 '한국마사회법 개정안'을 제출한 상태지만 실제 입법화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박민식기자 bemyself@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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