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이 현대사박물관 건립이라는 계획이 나올 때부터 이상했다. 박물관 건립위원회가 대한민국 수립 시점을 임시정부수립일인 1919년 4월 13일이 아니라 1948년 8월15일로 규정했다가 광복회 반발로 물러서고, 당초 2014년 개관을 2013년 2월, 2012년 12월, 다시 11월로 앞당기자 의구심이 커졌다. 급기야 전시구성과 방향 등에 대한 논의과정에서 일부 위원들이 자리를 박차고 나왔고 최근엔 관장 공모에서 보수성향의 인사까지 내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2010년 10월부터 지난 5월까지 총 예산 448억원을 들여 옛 문화체육관광부 건물을 리모델링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11월 개관을 앞두고 드러난 박물관의 모습은 정부의 근시안적인 역사인식을 보여준다. 이 박물관의 목적은 '19세기 말 이후 고난과 역경을 딛고 발전한 자랑스러운 역사를 기록하여 후세에 전승'하는 것이다. 최근 국정감사에서 지적됐듯이 한강의 기적 등 성공신화를 보수 우익의 관점에서 널리 알리겠다는 말이다.
만약 두 달 후 대통령선거에서 야당이 정권을 잡으면 이런 박물관을 그대로 둘까? 여야가 바뀔 때마다 전 정권에서 임명된 관장부터 내쫓을 테고 대대적인 전시물 교체가 반복되는 '고지전'이 전개될 게 뻔하다.
현대사박물관의 모범으로 꼽히는 독일연방공화국 역사의 집(이하 역사의 집) 건립과정을 보자. 나치의 끔찍한 악몽에다 분단의 절절한 아픔을 간직한 독일은 전후 성공적인 복구와 경제 성장으로 일찌감치 선진국 대열에 끼었다. 1982년 당시 헬무트 콜 총리는 본에 1945년 이후의 독일사를 재현하는 역사의 집을 건립하자고 제안했다.
독일 정부도 처음엔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서독의 성공을 자랑하려고 했다. 하지만 지식인들은 성공한 역사라는 개념은 근거도 없고 타당하지 않으며, 일방적이고 주관적 해석을 강요하는 박물관은 일종의 '궁정박물관'에 불과하다고 들고 일어났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역사관과 역사해석을 강요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역시 철학적 전통이 깊고 법과 원칙을 중시하는 독일인답다.
이렇게 10여 년에 걸친 학문적 토론과 논쟁을 벌인 끝에 통일후인 1994년 역사의 집이 개관했다. 그 뒤로도 논쟁은 계속됐고 상설전시관은 2001년, 2011년에 새로운 내용으로 수정, 보완됐다. 역사의 집 재단이사장 한스 발터 휘터의 말은 그들의 역사인식과 박물관의 지향점을 잘 보여준다. "전시회는 개인 나름의 선별적 기억들과 역사적 사실들 사이에 생겨날 수 있는 모순들을 '다리미로 평평하게 밀어버리지 않는다.'그 모순들로 인해 마찰지점들이 생겨나고 그것은 질문과 토론이 계속될 수 있는 토대로 기여할 것이다."
이 말은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史實), 즉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E.H.카의 명언과도 통한다. 역사는 과거에 있었던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이를 바라보는 역사가가 그 사실과 부단히 상호작용하는 과정이고, 이를 통해 진리를 형성한다는 의미이다.
역사박물관은 사실(史實), 그것도 한 면만을 보여주는 유물 창고이어서는 안된다. 현재와 과거의 대화가 이뤄지는 소통 공간이자 체험장이어야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형성한 삶의 흔적, 그들의 성공과 실패, 환희와 좌절, 가해와 피해가 모두 어우러져야 한다. 건국과 친일파 청산, 압축 성장과 희생, 5ㆍ16쿠데타와 민주화, 유신과 인권, 인혁당ㆍ장준하 사건의 전말, 세대간ㆍ지역간 갈등, 남북 문제 등 모든 과거사들이 조명되고 제자리를 찾도록 해야 한다.
이름에 걸맞은 박물관이 되려면 개관시기를 늦추고 지금부터라도 현대사 전공 학자를 참여시켜 전시방향과 내용에 대해서 토론을 시작해야 한다. 초대 관장은 반드시 명철한 역사인식과 균형감을 갖춘 인물이어야 한다. 정권이 바뀌어도 전시물이 교체되는 일이 없으려면 박물관을 재단법인으로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지금대로라면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역사도 없고 박물관도 아니다. 자신의 입맛에 맞는 치적만을 자랑하고 허구적 이데올로기를 심는 한낱 정권홍보관일 뿐이다.
최진환 문화부장 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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