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드 자넨 성차별주의자야, 여자를 혐오하는 괴물, 구시대적 냉전의 유물이기도 하지."
007시리즈 17탄 '골든아이'에 나오는 MI6 국장 M(주디 덴치 분)의 대사다. M의 말처럼 007과 냉전은 뗄 수 없는 관계다. 원작자 이언 플레밍의 전력(영국 해군정보부)을 봐도 그렇다. 플레밍 원작은 항상 선(서방)과 악(소련)의 명징한 대결을 상정한다. 그렇기에 냉전은 언제나 007영화의 단골 배경이었고, 철의 장막을 넘나드는 영국 스파이 제임스 본드의 가치를 높이는 영화적 장치였다.
1960~70년대 초기작을 보면 미국 우주선 방해 음모(62년 살인번호)나 소련 암호해독기 차지 경쟁(63년 위기일발)이 펼쳐지고, 소련 핵잠수함 실종 사건(77년 나를 사랑한 스파이)이 등장한다. 물론 원작과 영화의 차이는 있다. 영화에는 소련이 직접적인 적으로 등장하는 일은 거의 없다. 냉전을 이용해 한몫 챙기려는 가상의 국제조직이나 살인청부업자가 본드의 맞상대다.
그러나 현실에서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 취임과 함께 미소 군비 대결이 다시 시작되는 80년대 이런 조심스러움은 사라진다. 로저 무어는 미국 핵탄두를 터뜨리려는 소련 군부의 음모(83년 옥토퍼시)를 적발하고, 티모시 달튼은 무기를 빼돌리려는 소련 장군의 계획(87년 리빙데이라이트)에 맞선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는 89년 개봉된 '살인면허'에서 주적이 사라진 본드는 길을 잃고 헤매게 된다. 특이하게도 이 영화에서 본드는 임무 수행 대신 친구의 개인적 복수를 위해 뛴다. 뒤이어 91년 소련이 정말로 붕괴되자 제작자들은 이제 더 이상 냉전을 우려먹을 수 없는 상황을 깨닫고 새로운 적을 찾아 나섰다. 공교롭게 냉전 종료기는 007 시리즈가 가장 오랜 공백기(89~95년)를 가진 기간이다.
결국 본드의 적도 변한다. 본드의 옛 동료(95년 골든아이), 석유재벌의 딸(99년 언리미티드), 미디어 재벌(97년 네버다이)등 다양한 적이 본드의 상대로 나섰다. 그러나 세계의 절반을 지배하던 소련에 비해 이런 적들의 무게감은 떨어졌다.
2001년 9ㆍ11 테러 이후 본드는 이제 불량국가나 국제테러조직을 상대한다. '어나더데이'(2002년)에는 북한군 장교가, '카지노 로얄'(2006년)이나 '퀀텀오브솔라스'(2008년)에는 국제 무장조직이 본드의 적이다. 소련과의 정면 대결 대신 알 카에다의 산발적 공세에 맞서야 하는 서방의 새로운 안보 환경을 충실하게 반영한 것이다.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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