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글꼴(서체) 제작업체의 A대표이사는 지난 4월 과천 경마장을 찾아 TV화면을 보다 깜짝 놀랐다. 경기를 중계하는 화면에 나오는 글자들이 자신의 회사에서 만든 서체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이 서체는 경기장 내 전광판이나 자동발매기, 인쇄물, 홈페이지에도 사용되고 있었다. 즉각 마사회 법무팀에 항의를 했지만 "서체는 저작권을 인정할 수 없으므로 구매 의사가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A대표이사는 지난 5월 24일 법무법인 로고스를 통해 마사회를 저작권 위반 혐의로 고소했다.
컴퓨터에서 사용되는 한글 서체를 둘러싼 저작권 분쟁이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컴퓨터 상에서 내려 받은 서체 파일은 영화나 음원, 보안프로그램 등과 같은 소프트웨어로 분류돼 저작권법 보호를 받고 있지만, 개인은 물론 기업 공공기관조차 '서체는 공짜'란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김현숙 한국소프트웨어저작권협회 정책연구소장은 "글씨체 자체는 저작권과 무관하지만 컴퓨터에서 이용할 수 있도록 글꼴 파일로 제작된 경우 컴퓨터 프로그램 저작물로 보호를 받게 된다"며 "이를 무단 복제해 사용하는 것은 저작권 침해"라고 설명했다. '돋음'이나 '굴림' 등 사실상 무료로 유통되는 일부 서체를 제외한 'HY궁서' 'MD아트' '울릉도라이트' 등 저작권자가 유료로 배포하는 서체를 사용할 경우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서체에 저작권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건 2~3년 밖에 되지 않는다. 저작권 위원회 관계자는 "법적으로는 90년대부터 저작권 개념이 도입되기 시작했지만 국내 서체업체들이 워낙 영세해 권리를 주장하려는 움직임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서체업체들도 이젠 기업이나 공공기관 등에서 상업적인 용도로 서체를 사용하는 경우에 대해 법무법인을 통해 저작권을 문제삼고 있다.
한국마사회도 그런 사례다. 마사회는 고발이 이뤄지자 결국 서체를 불법 사용한 사실을 시인했지만 아직 정식구매는 하지 않고 있다. 마사회 관계자는 "서체에 저작권이 있는 것을 모르고 사용해온 게 사실"이라며 "서체 회사들과 원만한 합의를 시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마사회는 이후 일부를 무료 서체로 바꾸는가 하면 어도비 등 해외기업들의 소프트웨어는 정식 구매하기도 했는데, A대표이사는 "공기업이 외국업체 제품은 정식 구매하면서 국내 영세업체들의 소프트웨어 구매에는 버티기로 일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법적인 처벌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것도 문제라는 지적이다. 지난 3월 경북지역 최대 인쇄업체인 아이앤피는 고가의 출력용 고해상 서체 등을 불법 사용한 사실이 적발돼 대표와 회사측이 각각 500만원씩 벌금을 내야 했다. 서체 업체 관계자는 "위반 사실을 계속 부인하다 경찰의 압수수색으로 불법 파일이 적발되면서 겨우 벌금 처분을 받게 된 것"이라며 "하지만 이 회사가 불법 사용한 금액은 약 7억 원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보통은 결국 합의에 이르는 사례도 적지 않다. 서체업체인 한양정보통신의 경우 지난 7~8월에 건축사사무소 및 건설사 등과 5,000만원~1억원에 달하는 소프트웨어(한양서체)를 구매하는 데 합의하고 고소를 취하했다. 김현숙 소장은 "기업들이 상업적인 용도로 서체를 이용할 경우 다른 소프트웨어와 마찬가지로 내부 규정을 만들고 저작권을 획득하는 문화가 확립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환구기자 reds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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