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시리즈만큼 주연 한 명의 개인기에 의존하는 영화를 찾기 힘들다. 007은 바로 제임스 본드의 동의어이고, 누가 본드를 맡느냐가 작품성이나 흥행과 직결된다. 당연히 최고의 본드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이 끊이지 않는다. 007영화 50주년을 맞은 최근 영국과 미국 언론들도 해답을 찾느라 분주하다. 50년간 본드 역을 맡았던 여섯 배우를 평가해 누가 최고의 본드 반열에 오를 자격을 갖췄는지 알아본다.
코너리-원조 본드의 매력
최고의 본드를 찾을 때 항상 첫 손에 꼽히는 배우는 초대 본드 숀 코너리(82)다. 1탄 '살인번호'로 시작해 7탄 '다이아몬드는 영원히'까지 여섯 편에 출연한 그는 첩보영화 사상 최고 캐릭터로 꼽히는 본드 역에 생기를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1962년 '살인번호' 제작 당시 본드 역을 제안받은 배우는 코너리가 아니었다. 제작자는 높은 인지도를 지닌 미남 배우 캐리 그랜트를 염두에 뒀으나 계약상 문제로 32세의 무명 코너리를 선택했다. 원작자 이언 플레밍은 코너리를 두고 "내가 생각한 본드는 덩치 큰 스턴트맨이 아니다"며 탐탁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코너리는 우려를 불식했다. 188㎝ 당당한 체구에 포마드로 다듬은 머리, 이글이글 타오르는 초록빛 눈으로 남성적 매력을 발산하며 과격한 액션과 본드걸과의 애정신 등을 제대로 소화했다. 최근 미 공영라디오 NPR이 청취자 1만7,589명에게 실시한 설문에서 코너리는 56.3% 선호도로 최고의 본드에 꼽혔다.
무어-본드 전문배우
3대 로저 무어(85)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울 본드다. 무어는 오롯이 007만으로 영화팬의 기억에 각인된 배우다. 그는 45세(죽느냐 사느냐)부터 57세(뷰투어킬)까지 역대 본드 중 가장 많은 7편에 출연했다. 코너리가 정립한 강인한 본드 이미지에 코미디적 요소를 일부 가미, 오락성을 극대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총 스무 번의 키스신을 소화해 가장 플레이보이다운 면모도 과시했다(코너리 18회).
브로스넌-섹시한, 그러나 치명적인
5대 피어스 브로스넌(59)은 아내 카산드라 해리스가 81년 '유어 아이스 온리'에 출연하며 007과 인연을 맺었다. 85년 무어의 마지막 작품 '뷰투어킬'이 나온 뒤 후임에 거론됐으나 출연하던 TV 시리즈'레밍턴 스틸'이 방영을 연장하면서 훗날을 기약한다. 마침내 95년 '골든아이'로 5대 본드를 맡은 브로스넌은 섹시한 매력으로 침체에 빠진 007 시리즈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가 출연한 네 편은 모두 3억달러 이상의 수입(전세계 합산)을 거두며 상업적 성공을 거뒀다. 말쑥한 외모에 여자를 사로잡는 매너까지 갖춘 브로스넌은 그러나 이미지와 달리 네 편에서 무려 76명(여성 12명)을 살해, 가장 치명적인 본드로 기록됐다.
라젠비·달튼-단명한 본드
2대 조지 라젠비(73)와 4대 티모시 달튼(66)을 최고로 꼽는 사람은 거의 없다. 6탄 '여왕폐하 대작전'에 출연한 라젠비는 코너리가 높인 기대수준을 충족하지 못했고 제작자는 7탄에 코너리를 재기용했다.
60년대부터 코너리 후계자 물망에 올랐던 연기파 배우 달튼은 87년 본드 역할을 맡고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달튼은 무어가 구축한 '유쾌한 본드'와 상반되는 우울한 이미지 탓에 단명했다. 그러나 달튼이야말로 원작과 가장 어울린다는 평가도 있다.
크레이그-극강의 액션 본드
현직 본드 대니얼 크레이그(44)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을 보여주는 이질적 본드다. 영국 첩보원이라기보다 게르만이나 슬라브 냄새가 풍기는 거친 생김새, 미끈한 장신 첩보원이라는 본드의 기존 이미지를 깨는 178㎝의 단신, 이래저래 마니아들의 평가는 차가웠다. 역대 본드 중 유일하게 금발이라는 점까지 트집잡혔을 정도다.
그러나 크레이그는 본드 특유의 능글맞음을 배제하고 기름기 쏙 뺀 액션 연기도 충분히 통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역대 최강의 액션을 선보이며 맷 데이먼 주연의 본 시리즈 등 여타 블록버스터에 뒤지지 않는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카지노 로얄'과 '퀀텀 오브 솔라스'는 각각 6억달러 가까운 수입을 기록하며 역대 최고 흥행작이 됐다.
이제 세 편을 찍은 크레이그가 장기집권 한다면 코너리와 무어를 넘어 최고의 본드를 넘볼 만하다. 뉴욕타임스는 "새로운 본드가 영국의 반대자를 침묵시켰다"며 강인함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크레이그의 연기를 칭찬했다. 3대 본드 무어도 크레이그를 최고의 본드로 꼽았다.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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