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시대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듣는다. 연령과 직종과 사업의 구분없이 힘들다는 하소연이 늘고만 있다. 웃음과 기쁨의 소리보다 불만과 불평의 소리가 훨씬 크다. 행복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서 최하위다. 고통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그치지 않는다. 반세기 전이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소득과 소비수준이지만 고통지수는 더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왜 이토록 고통에 대한 목소리는 커졌으며 왜 이렇게도 고통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은 작아졌을까. 아니라면 고통지수가 높아졌다기보다 고통감내지수가 낮아진 것일까.
오늘날만 고통의 시대는 아니다. 우리 국민 모두가 고통의 시대를 살았다. 지난 세기 한민족에게 불어 닥친 고통과 고난은 반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식민지배와 전쟁 속에 민족 전체가 겪은 고통의 무게는 어느 민족에 비할 바가 아니다. 엄청난 고통의 시대를 이겨냈기에 아마도 한민족의 높은 고통감내지수와 강인한 민족성은 신앙의 힘과 함께 이 민족이 새롭게 번성하는 원동력이었다.
덕분에 한민족은 전쟁의 잿더미에서 다시 일어난 민족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겨레로, 한 세기 내에 피식민지배국가에서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유례 없는 국가로 온 세계에 각인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고통의 시대를 살고 있다. 민족적, 국가적 위상이 몰라보게 달라졌지만 해마다 우리의 벗어나지 못하는 이 고통의 실체는 무엇인가. 가난을 극복하면 고통에서도 벗어날 것이라고 기대했었는데 정작 지금 우리 모두가 겪는 고통의 뿌리는 어디인가. 청산하지 못한 과거사 때문인가. 아니면 해마다 성장하는 경제보다 더 급하게 성장하는 기대의 분출인가. 그보다는 오히려 전 지구적으로 확산된 세계화의 격랑 때문인가. 이 모든 외적인 조건과 상황보다는 우리 민족 특유의 속성이나 개인적인 성향 때문인가. 왜 이토록 우리는 고통스러워 하는가.
대체 인간에게 고통은 어떤 것인가. 고통은 일상적이다.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고통은 생명의 본질과도 같다. 살아 있어 고통스럽고 살아 있기 위해서는 고통을 자각해야 한다. 인간에게 고통은 생명의 다른 얼굴과도 같다. 죽은 자에게는 고통이 없다. 시신은 고통의 감각이 없다. 고통은 생명이 생명다울 수 있는 소중한 것이자 생명을 지키도록 허락된 선물이다. 과거 이 고통이 사라진 질병을 천형이라고 불렀던 것도 이해할 만하다. 그 천형에서 벗어나기 위한 절규는 단 한마디이다. 내게 고통을 돌려달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고통을 이해하고 고통을 수용하는 개인과 집단의 태도가 항상 고통 그 자체보다 문제의 뿌리에 가깝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 고통은 지나치게 부각되고 있고, 고통의 호소를 대면하기가 더 고통스러울 때가 잦다.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이 항상 미덕은 아니지만, 공동체를 배려하는 양심으로 기꺼이 손해를 자청하고 감내하던 숨은 의인들을 보기가 어려워졌다. 실제 고통보다 더 큰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난다. 결코 선한 이들에게 고통을 주는 개인이나 기업, 제도나 권력이 면죄부를 받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을 고친다면서 고통을 해결하기보다 고통을 가중시킨다면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공동체는 보기보다 연약하다. 공동체는 쉽게 고통의 호소에 흔들리고 지나치면 심각한 위기를 맞는다. 고통에 대한 태도는 아이와 어른이 달라서 어른이란 늘 타인과 공동체의 고통을 먼저 배려하는 존재이다. 성숙한 사회로 가는 지름길은 없다. 아픈 만큼 자라듯 고통의 시대를 이겨내는 만큼 성숙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고통의 시대에도 참된 신앙은 가장 성숙하게 고통을 이겨냈다. 신앙은 변함없이 고통을 해석함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나는 능력이다. 해석되면 모든 고통은 견딜만하다.
조정민 온누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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