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멕시코 국경에서 시작해 캐나다 국경 너머까지 아홉 개의 산맥을 따라 펼쳐지는 '너비가 고작 60㎝ 남짓이며 4,285㎞가 넘는' 도보여행 길이다. 20대 중반에 이 길을 혼자서 걸어 가겠다고 결심한 여성이 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가정폭력에 시달렸고, 사랑하던 어머니를 40대 중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암으로 잃고, 그 슬픔을 잊기라도 할 셈이었는지 이 남자 저 남자와 관계를 갖다 결국 결혼생활까지 파경을 맞은 '매일매일 깊은 우물 바닥에 처박혀 머리 위의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신세'의 여성이었다.
그런 나락의 나날에서 문득 그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 변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예전 모습을 되찾겠다는 것'이다. 인생을 우스꽝스럽게 만든 모든 것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자신의 의지와 힘을 다시 찾고 싶었다.
홀로 등에 배낭을 지고 산맥을 넘고 사막과 황무지, 인디언 부족의 땅을 밟고 지나간다. 아름다운 들판과 끝 모를 사막, 무성한 숲 풀 한 포기 없는 황무지, 크고 작은 야생동물들이 기다리고 있는 여정은 발톱이 모조리 빠지고 몸의 온갖 군데가 터져 나가며 피가 흐르는 고난의 연속이었고, 이 책은 그런 트레킹 경험을 자신의 과거사와 교차해 기록한 논픽션이다.
책을 넘겨가다 몇 달 전 읽었던 이라는 책이 떠올랐다. 세 자매의 맏이던 큰 언니를 암으로 잃은 뒤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저자가 독서로 위안 받으며 얻은 깨달음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슬퍼하는 것은 그 '죽음에 대해 있을 수 있는 유일한 반응이며, 우리가 삶 자체를, 그 모든 경이와 전율과 아름다움과 만족감을 얼마나 귀중하게 평가하는지에 대한 긍정'이라는 것이다.
는 이 책의 '독서 행위'를 '트레킹'으로 대체한 좀더 '와일드'한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고난의 행군을 경쾌하면서도 감성적인 글로 묘사해 간 끝에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나는 이미 어떤 것이 내 마음속에 담겨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텅 빈 손을 휘저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고 저 수면 아래를 헤엄치는 물고기를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의 인생처럼 나의 삶도 신비로우면서도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고귀한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 바로 내 곁에 있는 바로 그것.' 그리고 덧붙였다. '인생이란 얼마나 예측 불허의 것인가. 그러니 흘러가는 대로, 그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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