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사람 얼굴 모양의 석상인 모아이로 잘 알려진 남태평양의 이스터(Easter)섬. 칠레 영토인 이 섬에는 누가 언제 어떤 이유로 만들었는지 베일에 가려있는 모아이를 보기 위해 매년 5만명 이상 관광객이 몰린다.
원주민 레비안테 아라키(54)는 자신이 사는 이스터섬을 라파누이(Rapa nui)라 부른다. 라파누이는 원주민 말로 ‘거대한 땅’이란 뜻이지만 실제 크기는 우리나라 안면도보다 약간 크다. 아라키는 유럽인들이 1722년 부활절에 이 섬을 처음 발견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그는 6일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1888년 라파누이가 칠레에 넘어간 순간부터 원주민들은 독립을 원했다”고 말했다.
원주민들이 독립을 꿈꾸는 이유는 단순하다. 부족국가 형태로 자급자족하던 삶이 섬이 칠레로 넘어간 뒤부터 피폐해졌기 때문이다. 특히 칠레 정부가 10여년 전부터 관광수입을 위해 개발정책과 본토인 이주정책을 펴면서 원주민들의 설 자리는 점점 줄고 있다.
올해 기준 약 5,800명인 라파누이 전체 인구 중 본토인은 2,800명으로 원주민보다 조금 적다. 라파누이에서 3,600㎞ 떨어진 칠레 본토에서 건너온 사람들은 4년 새 1,000명 이상 늘었다. 원주민은 오세아니아 동쪽 해역의 수천 개 섬들을 일컫는 폴리네시아 계통이다. 인종적으로도 남미와 관련이 없다. 원주민 어부 로렌조 테파노(58)는 “본토인들은 원주민들을 개처럼 대한다”며 “원주민들은 호텔 허드렛일이나 물고기를 잡는 일로 삶을 꾸리고 있다”고 전했다. 폴리네시아 섬들 중 사모아(1962년) 통가(1970년) 투발루(1978년) 등의 독립국이 탄생한 것도 원주민들의 독립 열망을 더욱 자극했다.
독립을 향한 원주민들의 물리적 저항은 2010년에 가장 거셌다. 원주민들은 그해 9~12월 섬 내 10여개의 관공서 건물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다. 농성은 12월3일 새벽 칠레 본토에서 넘어온 전투경찰들이 최루가스 등으로 관공서 점거 주민들을 진압하면서 일단락됐다. 당시 독립지지 주민들로 구성된 ‘라파누이그룹’의 20명 이상이 크게 다치자 유엔은 양측에 자제를 촉구했다. 특히 칠레 정부에 원주민에 대한 폭력금지를 요구했다.
원주민들은 이후 비폭력 시위를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들은 현재 국제사법재판소 등을 통해 칠레와의 억울한 병합을 알리는 방안 등을 모색하고 있다.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꿈꾸는 뉴 칼레도니아 등 다른 폴리네시아 섬들과 연계해 독립운동에 나서는 방법도 검토 중이다.
칠레에 병합되기 직전까지 섬을 다스렸던 라파누이의 마지막 왕 시레온 리로 카인가의 손자인 발렌티노 리오로코 투키(81)는 “할아버지가 칠레 정부에 의해 독살된 정황이 있다”고 주장한다. 라파누이는 1862년 마지막 왕이 사망한 후 천연두 등 전염병이 창궐해 1877년 원주민이 110명에 불과할 정도로 줄어들었다. 결국 1888년 칠레에 병합돼 지금에 이르렀다.
칠레 정부는 원주민들의 독립요구가 거세지자 최근 많은‘당근’을 제시하고 있다. 섬 내 식수시스템을 정비하고 스페인어와 함께 원주민어를 함께 교육한다는 계획이다. 원주민 보호구역 확대 등도 검토 중이다.
원주민들의 독립에 가장 큰 걸림돌은 칠레 본토에 대한 의존도다. 도로와 공항, 통신 등 사회간접자본은 물론 모든 경제활동이 칠레 본토 영향 아래 있어 독립을 이룬다 해도 당장 신생국가로 거듭나기 힘들 정도로 경제부문의 독립성은 취약하다. 알베르토 호투스 라파누이 의회 의장은 “본토에 대한 경제 의존도가 높은 게 현실”이라며 “이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실질적인 독립을 이루기에 어려움이 있다”고 털어놨다.
NYT는 라파누이의 역사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준비 안 된 섣부른 독립을 무턱대고 지지할 수는 없지만, 원주민들이 독립을 바라는 이유에 대해서는 국제사회가 귀 기울일 시점이 됐다는 것이다. 테리 헌트 하와이대 인류학과 교수는 “이스터(라파누이) 섬은 인류가 지구상 대륙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나와 생활터전을 잡은 곳 중 하나”라며 “아직 남아있지만 언제든 사라질 위험에 처해 있는 이스터 섬의 원주민 문화는 인류학적으로도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밝혔다.
이태무기자 abcdef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