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 열풍 이후 정부가 조성한 걷는 길이 500곳이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처마다 경쟁적으로 길을 조성한 탓에 한 지역에 여러 개의 길이 생기고 최소한의 이용정보조차 얻을 수 없는 길도 있는 등 예산 낭비와 관리 부실이 지적되고 있다.
11일 환경시민단체 녹색연합이 지난 6월부터 진행한 실태조사결과에 따르면 2008년 이후 정부가 조성한 걷는 길은 ▦행정안전부 125곳(2년간) ▦환경부 49곳(5년간) ▦국토해양부 30곳(3년간) ▦문화체육관광부 101곳(5년간) ▦산림청 14곳 등 총 500여곳으로 집계됐다. 이처럼 넘쳐나는 걷는 길은 중복 투자로 인한 예산 낭비뿐만 아니라 보행자 안전 위험, 관리 운영 부실 등 문제가 있는 것으로 지적됐다.
행안부는 1,200억원이란 막대한 예산 집행에도 불구하고 길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통합 홈페이지조차 없었고 이용자 수요 판단, 조성 후 관리 운영 방안 등이 전무했다. 2011년 10억을 들여 강원 정선군에 만든 '산세따라 걷는 길'은 관광안내소를 포함해 소요 시간이나 코스 등 이용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이 없었고 2011년 25억의 예산으로 전남 영암에 조성한 '왕인문화체험길'은 나무를 베어내고 난간을 설치해 오히려 환경이 훼손됐다. 전남 해남의 '강강술래길'은 해안 바위에 시멘트로 난간을 고정시켜 위험했다.
녹색연합 관계자는 "행안부는 ㎞당 길 조성 비용이 평균 8,200만원으로 산림청(1,400만원) 환경부(3,000만원)보다 많은 예산을 투입했는데도 관리는 가장 부실했다"며 "행정조직 관리가 주된 업무인 행안부가 길 사업을 벌인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부처 간 협의 부재로 길 위에 또 길이 생기는 중복 투자와 예산 낭비 문제도 심각했다. 국토부가 동해안 일대에 조성한 '관동팔경 녹색길'은 역시 국토부의 '해안누리길', 문화부의 '해파랑길', 강원도의 '낭만가도'와 겹쳤다. 문화부가 2010년 경북 문경에 개척한 48㎞의 '유교문화길'에 행안부가 이듬해 10억을 들여 5.5㎞의 '선비길'을 조성한 사례도 있었다. 부처별로 각각 지정한 탓에 같은 공간에 다른 이름이 붙여지고 이정표도 제각각이어서 탐방객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
녹색연합은 7월 올레길 사고 이후 걷는 길 안전이 화두가 됐지만 부처가 재정이나 인력이 열악한 지자체에 관리를 떠넘겨 유지보수관리 등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이용객들의 불안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서재철 녹색연합 자연생태국장은 "길에 대한 개념과 원칙 부재가 낳은 결과"라며 "걷는 길을 심층적으로 진단하고 조성부터 관리까지 체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정승임기자 chon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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