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해 동안 대학에서 글쓰기와 말하기를 가르쳤다. 글쓰기라는 수업 특성상 대학생들의 개인 삶에 대해서 제법 알게 되는데 마트나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땀 흘리는 이들이 정말 많았다. 그저 용돈벌이 정도가 아니라 생활비를 버는 학생도 있었다. 그들은 아무래도 다른 이들보다 결석이 많거나 과제물을 덜 냈는데 성적을 매기다 보면 이런 성실도 요소 때문에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독립적으로 살기 위해 땀흘리는 것만큼 성실한 삶이 없을 텐데 개인사정을 감안할 수는 없어서 학사결과로만 성적을 매겨놓고 몇 주 동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들이 사회에 나가서 취직을 하려고 할 때 기업이 중요하게 보는 것은 성적이고 그 때문에 그들이 입을 불이익이 마음 아팠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들에게 성적을 높게 주면 되지 않느냐 하겠지만 원칙은 원칙이라는 고지식한 성정상 그게 어려웠다.
실상 사회에서, 회사에서 보탬이 되는 인간형은 스스로 땀흘린 노동의 경험이 있는 이들일 것이다. 그런데도 기업에서 요구하는 자격('스펙')에는 이런 아르바이트 경험을 쓸 자리가 한정돼 있다. 오히려 외국어 시험점수나 외국연수, 명성 높은 기관의 인턴 체험 같은 것은 아주 근사한 경험으로 우대받는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오히려 부모의 '스펙'일 가능성이 크다. 큰 돈이 들어가는 외국 연수는 말할 것도 없고 외국어점수조차 몇 번이고 시험을 치르면 유리하니 고소득층 자녀에게 유리하다. 또 명성있는 기관이나 대기업의 인턴 역시 다는 아니지만 인맥이 좌우하는 분야이기도 하다.
물론 대기업의 취업 첫 관문을 좌우하는 자기소개서에는 아르바이트 경험을 말로 녹여내는 문항이 들어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딱히 쓰기 어려운 곳이 더 많다. 오히려 외국연수, 토익토플 점수, 인턴체험은 별도 항목으로 쓰게 되어 있는 반면 아르바이트 체험은 스스로 명분을 부여해서 써야만 쓸 수 있는 것이 되어 있다. 게다가 마트나 커피숍 아르바이트는 유능하지 못해서 몸으로 일했다는, 어쩐지 '찌질한' 경험으로 평가받는 그런 분위기까지 있다. 그래서 대기업에 부탁한다면 '자신만의 노력으로 돈을 번 아르바이트 체험'을 반드시 한 항목으로 물어주었으면 좋겠다. 그 대신 부모의 힘이 개입해야 하는 스펙은 쓸 수 없거나 적게 쓰는 방안도 찾아봤으면 좋겠다.
이것은 대학교 입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대입 사정관 제도니 하여 다양한 체험을 중시하는 대입경로가 열린 듯하지만 실상 내용을 들여다보면 부모의 개입으로 할 수 있는 체험이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분야들이 많다. 뿐만 아니라 정시 시험은 오로지 세 군데만 낼 수 있으면서 수시 시험은 여섯 군데나 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부모의 소득에 따라 대입 지원을 제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나마 수시 지원은 무제한 할 수 있는 것에서 여섯 차례로 제한하는 것은 나아졌다고 하겠으나 정시와 차이가 있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부모 덕이 아니라 스스로 땀 흘린 결과로, 돈이 아니라 개인의 능력에 따라 자격을 심사하는 제도가 곳곳에서 정교하게 세워지지 않으면 부와 가난의 대물림은 더욱 심해지고 그만큼 한국사회는 더욱 불안정해진다.
실상 고등학교 학생에게 과도한 입학 스펙을 요구하는 것은 국가가 공교육을 통해 해야 할 책임을 개인에게 미루는 것이며 대기업이 취업준비생에게 과도한 입사 스펙을 요구하는 것은 기업이 훈련시켜야 할 책임을 개인에게 미루는 것이다. 그로 인해 부익부 빈익빈의 고리는 점점 거세지고 있다.
온 사회가 개인에게 스펙을 강요하기 전에 공적인 경로를 성실하게 밟기만 하면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서화숙 선임기자 hss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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