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들은 갑오년 그때처럼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척왜양(斥倭洋)의 기치를 세우고 봉기했다. 이들은 고창에서 일본군과 조우하여 전투를 벌였으나 무기라고 해봤자 관아에서 빼앗은 화승총과 칼이며 몽둥이와 죽창이 고작이어서 신식 양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당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비가 억수로 쏟아져 물기에 젖은 화약과 화승을 격발시킬 수 없게 되자 패하여 부안 장터로 후퇴했고 일본군이 추격하여 장터를 포위하고 농민군을 몰살했다. 외곽에 있었거나 다른 군현을 점령했던 농민 병력은 예전처럼 다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서일수도 어둠 속에서 농민 잔여 병력과 함께 산으로 올라갔다. 삼남 지방의 곳곳마다 이러한 크고 작은 민요가 일어났고 이들은 관군에 쫓겨 집과 마을을 떠났으며 산으로 들어가 의병이 되거나 활빈당이 되었다.
박도희도 옛날 농민군에 들었던 행수와 대두를 찾으러 다녔더니, 어느 곳에서 죽었다거나 행방불명되었다는 후문과 함께 많은 젊은이들이 사오십 명씩 무리를 지어 화적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깊은 산간에 숨어 살거나 행상을 가장하여 장터에 내려왔다가 부잣집이나 관아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내포 일대와 충청도 내륙 지방에서부터 경상도의 서쪽 산간 지역에 이런 이들이 수천 명이었다. 그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 천지도의 농민군으로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던 경험이 있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경신년 무렵부터 서로 전국적으로 연계하여 스스로를 활빈당이라 부르고 있었고 지역마다 지도자인 사장(師丈)과 유사(有司)를 두고 있었다. 그들은 부잣집이나 큰 사찰과 관아를 습격하여 재물을 빼앗아 빈민들에게 나누어주는 활빈 투쟁을 하였다. 이들 거의가 천지도의 지도부가 사라진 뒤에 관군에 쫓긴 잔여 농민군이었고 이들은 또한 을미의병에 가담했다가 살아남은 자들이기도 하였다.
이신통과 손천문은 경서 집필의 진전이 있어서 초고를 지니고 일단 단양을 떠났고 청주 산외면 속리산 서북쪽 기슭에 마련한 거처로 옮겨갔다. 신사께서 돌아가시고 두 해가 지난 경신년 봄에 신사의 봉도소를 모시고 다니던 제자들은 다시 한양에서 모이기로 하였으니 스승의 이장 문제 때문이었다. 서울 도인들이 재촉하여 오기를 이전에 가매장했던 송파의 밭 임자가 관의 지목이 두려우니 제발 묘를 옮겨가 달라고 사정한다는 거였다. 그해 삼월 초에 이신통과 손천문 그리고 연락을 받은 서일수와 박도희가 상경했고 서울에 은신하고 있던 손의암과 몇몇 도인들이 모였다. 이들은 송파에서 스승의 유골을 수습하여 여주 천덕산에 안장하고 나서 각자 헤어졌으니 삼월 보름께였다.
그해 여름에 전라도 일대를 잠행하던 서일수와 이신통과 함께 책을 쓰고 있던 손천문이 거의 같은 무렵에 체포된 것은 기이한 노릇이었다. 그것도 같은 지역인 청주에서였다. 서일수는 갑오년에 이미 처형된 예전 남대 대행수들의 조직 근거지를 뒤밟아 전라도의 도인들을 만나고 다니다가 칠월 초에 처가가 있는 청주 율봉마을 음 씨 댁을 찾아갔다. 주인 음 씨는 그래도 땅 마지기나 갖고 있던 중농이어서 밥은 먹고 살았는데 두 딸을 차례로 서일수와 신사의 장남에게 시집보낸 탓으로 세상을 피하여 숨어 살다시피 하고 있었다.
한편 신통의 이복형 이준은 청주목에서 비장을 다니더니 관제 개혁 이후에 포졸은 순검(巡檢)이 되었고 포교는 권임(權任)이 되었으며 비장은 총순(總巡)이 되었다. 이준은 위로는 상관인 경무관을 모시고 아래로 백여 명의 권임과 순검들을 지휘하는 입장이었다. 이준은 전에 자신이 기찰과 함께 잡아들였던 서일수의 인적사항을 나중에야 자세히 알게 되었다. 서일수가 천지도 교주의 최측근이었으며 갑오 난리 때에는 그가 남대의 김덕영 대행수와 더불어 청주성 공격을 직접 지휘했다는 것도 알아냈다. 서일수가 당시에 유배형을 받고 나서 무슨 수로 풀려났는지 다시 활동 중이라는 소문도 입수했다. 그는 아우 신이가 진작부터 천지도에 입도했고 수 년 동안 이들과 함께 활동했다는 것은 알았으나 그들의 수하에 지나지 않는 졸개일 것이라고만 여기고 있었다. 도인 출신 순검의 기찰을 통하여 서 아무개의 처가가 청주 관내에 있으며 그곳이 바로 율봉마을이라는 것까지 알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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