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명 높던 히드로공항의 변신
서비스디자인 프로젝트 6조원 투자… 수하물 수속 개선 등 서비스 차별화…1,2시간 걸리던 대기시간 크게 단축
스마트폰 추가기능 국가별 특화
아이들이 아빠 폰 많이 쓰는 인도엔 중요한 정보 삭제 방지책 제안… 도로건설 활발 中엔 지도 기능 강화
금융 서비스디자인의 메카 스페인
바클레이銀 아이패드로 계좌 개설… 은행직원이 찾아가 통장·카드 발급… 개인 재무설계 서비스 개발도
4년 만에 찾은 런던 히드로공항은 예전과는 달랐다. 공장처럼 휑한 공간에 10여 개의 입국 심사대만 있어 1, 2시간이 걸리던 대기시간은 크게 단축됐다. 지난 8월 열린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일어난 변화다.
그러나 이전부터 히드로공항은 서서히 변화를 겪고 있었다. 변화 전 히드로공항은 입국 시 거치는 과정을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구조와 비효율적인 동선, 긴 수속 시간 등으로 악명이 높았다. 하지만 이런 위기를 도약의 기회로 포착한 영국의 버진애틀랜틱항공은 히드로공항 터미널에 43억유로(약 6조원)를 투자하고 자체 디자인 팀을 비롯해 건축회사, 인테리어 회사, 서비스디자인 회사 등과 합작해 런던을 찾은 이들의 경험을 새롭게 디자인했다.
디자인한다는 의미는 작게는 의자나 항공사 데스크의 모양, 배치 변경 정도를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서비스디자인 시각으로 접근하면 공항에서 승객의 무의식적 행위를 끊김 없이 이어주어 공항에서의 만족감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것으로까지 범위가 확장된다. 이것을 '심리스 플로우'(Seamless flow)라고 부른다. 결과적으로 히드로공항 내 곳곳에 셀프 체크인 기기를 배치해 대기시간을 줄였고, 자동차에 탄 상태로도 짐의 무게를 재고 부칠 수 있게 하는 등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해 고객 만족도를 크게 높였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회사 중 하나가 2000년 설립된 영국의 첫 서비스디자인 전문기업 엔진(Engine)이다.
제품 디자이너 출신의 올리버 킹(Oliver King)과 조 히피(Joe Heapy) 공동 대표가 서비스디자인 회사를 설립한 데는 세계 산업의 변화에 대한 고민이 맞물려 있다. "산업의 중심축이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이후 구글이나 페이스북처럼 데이터가 축적되면서 상품화를 모색하는 데이터 비즈니스로 옮겨가고 있어요. 제품은 완성해놓으면 끝이지만 서비스는 유동적이거든요. 그러니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는 사용자들이 어떻게 사용하고, 또 어떻게 사용하길 원하는지에 대한 관심이 많죠. 이 때문에 점점 더 서비스디자인에 대한 수요는 늘어가고 있습니다." 히피 대표의 설명이다.
최근 5년 사이, 자발적으로 서비스디자인 회사를 찾는 기업이 많아졌다. 기반을 갖춘 서비스디자인 회사의 클라이언트 중에는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글로벌 기업이 다수를 차지한다. 로컬 기업은 자체 브랜드의 서비스 개선을 의뢰하지만 글로벌 기업은 나라마다 다른 고객들의 행동방식에 대한 조사와 그에 따른 서비스디자인을 요청해온다.
2003년에 설립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과 영국 런던에 사무실을 둔 '스탠바이'(STBY)는 일종의 서비스디자인 연구소다. 런던 사무실을 이끄는 헤케 반 디크(Geke Van Dijk) 박사는 "기업이 서비스 혁신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세 가지가 있는데, 핵심 사업을 다양하게 확장하고 싶을 때,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고자 할 때, 기존의 사업에서 전략적 기회를 찾을 때 많이 이용한다"고 설명했다.
최근 스탠바이는 몇 년 사이 전세계적으로 사용되는 스마트폰 이용 현황을 인도 중국 영국 미국 러시아 5개국에서 조사했다. 각국의 사용 방식의 차이가 두드러졌다. 도로 건설이 활발한 중국에서는 스마트폰을 통한 지도 업데이트 횟수가 잦고 또한 그 이용도 많았다. 러시아에서는 어떤 브랜드를 사용하는가가 사회적 지위를 드러냈다. 영국은 프라이버시를 중시해 스마트폰의 내용을 공유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지만 전통적으로 일요일 점심을 가족과 함께 먹는 중국에서는 서로의 사진 등을 돌려 보는 경우가 많다. 인도에선 아이들이 아빠의 스마트폰을 빌려 비디오나 사진을 찍는 사례도 많았다. 이런 경우 아빠 스마트폰에 저장된 중요 정보가 아이들의 손길로 지워지는 것에 대한 방지책은 필수적이다. 스탠바이는 이처럼 조사결과를 토대로, 스마트폰 제조 업체에 추가적으로 필요한 스마트폰 기능을 제안하기도 한다.
1939년부터 40여 년간 이어진 프랑코 독재정부로 몸살을 앓아온 스페인에서는 긴 억압의 시간을 만회하려는 듯 유독 금융산업의 혁신성이 두드러진다. 최근 몇 년간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금융위기를 겪고 있지만 여전히 이곳은 전세계 금융계의 혁신적 마켓으로 불린다. 덕분에 금융계에서 이뤄지는 다수의 서비스디자인 프로젝트가 이곳에서 경험을 쌓은 서비스디자이너들에게서 만들어진다.
런던 본사 외에 헬싱키 마드리드 샌프란시스코 등 전세계 8개 도시에 지사를 거느린 서비스디자인회사 피요르드(Fjord)에서도 금융 서비스디자인이 가장 활발한 곳이 마드리드 지사다. 이들은 영국의 글로벌 은행 바클레이(Barclays)의 의뢰를 받아 최근 바클레이 포르투갈 지점에 아이패드를 통한 계좌개설 서비스를 오픈했다. 바클레이의 계좌 개설 앱을 아이패드에 다운로드 받은 직원이 고객의 계좌 개설을 돕는 것으로, 직원과 고객의 번거로움을 모두 덜어냈다. 바클레이 직원은 지점에서도 고객을 맞을 수 있지만 보험설계사처럼 고객을 찾아갈 수도 있다. 스페인 주민카드(DNI), 재직증명서 등 기존에 필요로 했던 많은 서류 중 몇 가지만 챙겨오면 주민카드의 사진을 아이패드로 촬영하고 필요한 정보를 수집한 후 그 자리에서 바로 통장과 카드를 발급해주는 서비스다. 보통 30분은 걸리는 데다 며칠 후 고객이 카드를 찾으러 은행을 재방문해야 하지만 이 서비스로는 10분만에 끝낼 수 있다.
현재 이 서비스는 개인재무설계를 도와주는 서비스 개발로 확장 중이다. 고액 투자자만 받을 수 있던 재무설계 과정을 모든 은행·증권 고객들이 직접 경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투자 금액, 현재의 유동자산, 리스크 감당 비율 등을 직접 아이패드 터치로 조작하면 된다. 피요르드의 그룹 뉴비즈니스 부문 이냐키 아마테 디렉터는 "어려운 금융서비스를 쉽게 풀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미국처럼 스페인과 포르투갈도 금융 상품 판매 과정이 복잡하고 어려운데, 이것을 얼마나 쉽게 해줄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춘 프로젝트"라고 설명했다.
글로벌 시대라지만 지역적 특수성에 맞춘 서비스디자인 역시 여전히 필요하다. 3, 4개월 후 스페인 대형 은행 BBVA에 도입되는 EMO라는 키오스크가 그 예다. EMO는 간단히 말해 은행에서 할부로 물건을 구입해 집까지 짧은 시간 내에 배달을 도와주는 기기다. 스페인에서는 은행에서 집, TV, 비디오 카메라, 세탁기, 자동차 등 덩어리 큰 상품을 구입할 수 있는데, 그동안은 은행원과의 상담을 통해서 가능했다. EMO는 은행원의 업무부담을 줄이면서 백화점에서 할부로 물건을 구입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대폭 단축시켜준다. EMO가 탄생한 배경에는 우리와는 다른 스페인의 백화점 할부 제도가 있다. 스페인의 백화점은 정부에서 운영하는 엘코르테 잉글레스(El Corte Ingles)뿐인데, 할부로 구입할 경우 백화점에서 은행이나 카드사에 신용 정보를 의뢰한다. 이 과정이 3일 정도 걸린다. 하지만 EMO를 통하면 신용 정보 확인에 걸리는 시간을 몇 분으로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만큼 상품을 받아보는 시간도 앞당겨진다. 다만 이 서비스는 BBVA에 계좌를 오픈한 고객에 한정된다. BBVA는 고객들의 일상적 불편을 개선해 고객 만족을 끌어올리는 동시에 신규 고객 유치라는 이득도 누리게 된다.
공동기획 : 한국일보·한국디자인진흥원
런던ㆍ마드리드=이인선기자 kel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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