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로는 모든 소식이 끊겼습니다. 한 도인으로부터 작년에 서 대행수도 처형되었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혹시 남편의 소식을 들을까 하여 찾아뵈었지요.
박 선비는 잠시 천정을 올려다보며 망연한 표정이더니 나에게 말했다.
그렇소이다. 갑오년에 시작된 혁명이 이제 다 끝났지요. 그러나 아주 끝나버린 것은 아니외다. 물이 말라 애를 태우던 가뭄이 지나면 어느새 골짜기와 바위틈에 숨었던 작은 물길이 모여들고, 천둥 번개가 치면서 비가 오고, 강물은 다시 흐르겠지요. 백성들이 저렇게 버젓이 살아 있는데 어찌 죽은 이들의 노고가 잊히겠습니까? 세상은 반드시 변할 것입니다.
하고 나서 그의 이야기는 신사께서 죽어 묻히던 그때로 돌아갔다.
신사가 죽은 뒤에 한양에 머물고 있던 이신통은 손천문과 더불어 횡성으로 내려왔다. 서일수가 박도희의 거처에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두 사람은 아직 신사의 체포와 처형의 소식을 모르고 있었다. 다만 측근인 이신통 등의 연락이 두절되어 신사께서 어느 다른 곳으로 피신하여 도소를 마련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원주에서 기별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그들이 와서 스승의 최후를 전해주자 서일수와 박도희는 서로를 붙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소식을 알려준 이신통과 손천문도 새삼스럽게 설움이 북받쳐서 다시 통곡하였다. 울음이 그치고 나서 손천문이 소매로 눈을 씻고는 말했다.
도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하오. 이제 다시 교세를 넓히기 위해서는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쉬운 경전이 필요합니다. 교조 대신사의 도경을 풀어서 새 방각본을 만들어야 하고, 이세 교주이신 신사의 말씀과 행적을 모두 기록해내야 되겠습니다.
서일수도 자기 생각을 말했다.
지금 남대에는 죽은 이도 많지만 살아남은 이가 더 많습니다. 다시 이 사람들을 모으고 일으켜 세워서 천지도와 두 스승님의 신원을 해내야만 전국 팔도의 도인들이 마음 놓고 수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의논 끝에 이신통과 손천문은 어딘가 안전한 곳에 은신하며 일흔두 해를 살다 죽은 스승의 생각과 행적을 기록하기로 하였다. 그가 대신사에게서 도통을 물려받은 것이 서른일곱 살 때였으니, 삼십오 년 동안이나 경상 전라 충청 강원 경기 다섯 도계를 넘나들며 풍찬노숙과 굶주림과 도인들끼리의 주도권 다툼에 시달리면서도 끊임없이 관속과 기찰꾼들에게 쫓기면서 백성들 스스로가 하늘 같은 존재임을 일깨우고 다녔다. 손천문과 이신통은 측근에 있으면서 신사를 며칠 또는 몇 달씩 숨겨주고 수발했던 벽지의 백성들이나 연락 도인들을 통하여 스승의 숱한 행적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기억하고 있었다. 서일수는 우선 전라도로 내려가 흩어지고 망실된 행(行)과 대(隊) 가운데 누가 온전하고 누가 죽었는지, 또는 누가 변하여 도를 버렸고 누가 지금까지 신심을 지키고 있는지, 자세히 알아서 남대를 다시 조직하겠다는 거였다. 박도희도 충청도 내포 일대와 내륙 산간 지방의 도인들을 돌아보고 북대를 다시 추스를 생각이었다.
이신통과 손천문은 단양 근처 소백산 자락에서 한 해 동안 최경오 신사의 기록을 해나갔고 서일수는 전라도를 잠행하고 있었다. 서일수는 갑오년에 죽어간 남대의 대장 김봉집이 일어났던 고부 무장 고창 부안 장성 영광 함평 등지에서 예전 천지도의 행수와 대두들을 만났다. 이름이 알려지고 세가 컸던 부대의 지도자들은 거의가 죽고 흩어졌으나 젊은 대두들은 시골 마을의 대동계와 두레 중심이어서 들판의 풀처럼 꿋꿋하게 살아 있었다. 이들 거의가 천지도에 입도한 적이 있었고 죽어간 여러 대행수와 함께 전주에서 보은에서 우금치에서 또는 삼남 군현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신사가 처형된 해의 겨울에 고창에서 군수를 쫓아내는 민요를 일으킨 일이 계기가 되어 고부에서 농민 수백여 명이 들고 일어나 관아를 점령하고 무기를 탈취하여 이웃 고을 무장까지 점령했다. 고창 읍성을 점령한 농민군은 영암의 민란을 지원하고 광주 전주 등의 도회지와 전라도의 크고 작은 고을을 돌면서 세를 키워서 서울로 치고 올라갈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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