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말에 김봉집이 군수의 탐학에 못 견디어 봉기했고 각 지역의 남대 대행수들도 함께 일어나 갑오년 난리로 이어지게 됩니다. 저는 내포 지역에서 도인들과 더불어 거병하여 처음에는 면천으로 진출한 일본군을 당진 구룡리에서 크게 이겼고 홍주성을 포위하고 공격에 나섰지요. 남대의 주력은 같은 무렵에 공주 감영을 치기 위해 우금치에 진을 쳤고 서일수는 청주성을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패잔하여 구사일생이 된 다음에 이신통이 우금치에서 생환하였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서부 해안 고을과 내포 일대를 휩쓸던 농민군은 홍주성에서 대포와 양총으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에게 저지당했지요. 이틀 낮과 밤을 싸웠으나 이름 있는 행수 대두와 젊고 날랜 민병들 수천이 전사했고 해미와 서산으로 몰려 마지막 전투에 패하고 흩어졌지요. 사정은 충청도 동쪽에서도 마찬가지여서 관군과 일본군의 신식 무기에 패퇴했고 우금치의 패전 이후에 남도 지방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 작전이 이어졌습니다. 실로 젊고 기백 있던 아까운 젊은이들이 일본군과 관군 그리고 마을의 부호와 유생들이 조직한 민보단에게 죽임을 당했고 쟁쟁한 대행수들이 잡혀 죽었습니다. 김봉집 이하 호남의 다섯 대행수가 모두 상금과 벼슬을 노린 친척이나 믿음을 버린 교도와 마을 사람들의 배신과 밀고로 잡혀서 일본군과 관헌에 의하여 한양에 잡혀 올라가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일부 신도들은 서일수와 김봉집의 거사가 신사의 뜻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일이 벌어지자 신사께서는 '호랑이가 물려고 들어오면 가만히 앉아서 죽을까,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가 싸우자' 하시면서 거병을 명하셨지요. 어느덧 삼 년이 흘렀거늘 이제 상처와 슬픔도 가시고 새살이 돋고 있으니 다시 하늘의 도를 천하에 펼치게 될 것입니다.
박도희는 말하다 스스로 숨을 삼키기도 하고 복받쳐 눈물도 흘렸다가 한숨을 내쉬면서 이야기를 끝냈다. 나는 이야기의 고비마다 가슴을 졸이기도 하고 함께 슬퍼하면서 들었고, 마침내 이신통이 나와 평안한 살림을 펼치지 못하고 떠나게 된 그 심사를 헤아릴 수가 있었다.
그러면 저는……
하면서 나는 머뭇거리다가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그이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겠습니까?
박도희는 잠깐 고개를 숙이고 침묵하고 있더니 나에게 말했다.
만나면 또한 곧 헤어지게 될 터인즉 만나서 어찌 하시렵니까?
박 선비님처럼 이렇게 산간에서 숨어 살아도 좋습니다.
내 말에 박도희는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신통 아우는 저와는 지금 처지가 다릅니다. 그는 신사님 측근에서 그이의 말씀과 행적을 경전으로 쓰는 일을 맡았습니다. 천지도가 신원되고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위해서는 이신통의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요. 그 일은 조선 팔도에서 죽어간 모든 천지도인들의 꿈과 소망을 짊어진 일입니다.
그럼 이번에 한 번 만나면…… 그이의 일이 끝나기 전에는 다시는 찾으러 다니지 않으렵니다.
그러시다면 저와 함께 길을 떠나십시다.
예? 정말이요?
나는 저도 모르게 앞으로 다가앉았고 박도희가 말을 이었다.
다음 달 사월 초닷새 날이 저희 천지도의 창도(唱導) 기념일인데 그날 신사께서는 몇몇 사람만 부르셨습니다. 관의 지목이 촉박한 중에 임시 거처에서 이루어지는 만남이라 제가 다른 도인들의 핀잔을 받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찌 하겠습니까? 다만 혼자 따라오셔야 합니다.
곁에서 묵묵히 앉았던 안 서방이 입을 떼었다.
제가 인근 고을까지 따라가서 기다렸다가 모시고 돌아오면 안 될까요?
박도희는 안 서방이 우금치에서 이신통을 살려내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지라 잠잠히 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되겠군.
이미 날짜는 사월에 접어들었고 장소가 어딘지는 몰라도 이삼 일 길은 될 것이라 적어도 낼이나 모레쯤에는 길을 떠날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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