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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이주일의 小史] <65> 기자정신의 상징 최병우기자 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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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이주일의 小史] <65> 기자정신의 상징 최병우기자 순직

입력
2012.09.24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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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대만의 전쟁이 한창이던 1958년 9월 26일 포연이 자욱한 금문도 취재를 위해 상륙을 시도하던 한국일보 최병우 기자가 배가 뒤집혀 동료 외국인기자들과 함께 실종됐다. 광복 후 종군기자로 활동하다 순직한 최초의 기자가 된 그의 당시 나이는 34세였고, 직책은 한국일보 논설위원 겸 코리아타임즈 편집국장이었다.

1924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난 최병우는 일본 도호쿠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뛰어난 외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광복 후 미 군정청 외무처에서 일했으며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는 주일대표부에서 서기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가 운명적인 신문기자의 길을 걷게 된 이유는 한국일보 창간사주였던 백상 장기영 선생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도쿄의 주일대표부에서 일하던 50년 봄, 한국은행 조사부장이었던 장기영을 처음 만나게 되고 52년 장기영이 조선일보 사장으로 부임하면서 최병우는 외신부장의 직책을 맡으며 언론계에 발을 디뎠다. 54년 6월 9일 장 사장이 한국일보를 창간하자 그를 따라 한국일보 외신부장으로 일터를 옮긴 후 편집부국장을 거쳐 56년 한국 최초의 영자지 코리아타임즈 편집국장으로 발탁됐다.

그의 기자생활은 5~6년 정도밖에 안 됐지만 이 짧은 세월에 보여준 기자정신은 대단한 것이었다. 쉼 없이 공부하며 현장을 떠나지 않는 그의 삶은 후배 기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기에 충분했다.

최 기자의 순직현장인 금문도는 중국에서 항일전쟁이 끝난 후 국공내전을 통해 공산당 정부를 수립한 마오쩌뚱이 전쟁에서 패해 본토에서 타이완으로 도망친 장제스 정부와 영토를 놓고 일전을 벌인 곳으로 유명하다.

49년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본토에서 쫓겨나면서 금문도를 최후의 보루로 삼았다. 중국 본토에서 불과 2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이곳에 최후의 배수진을 친 4만 여 명의 국민당 패전병들은 말 그대로 죽음을 무릅쓰고 이곳을 사수했다. 호시탐탐 금문도를 노리던 중국의 인민해방군은 58년 8월23일 대규모 군사도발을 감행했다. 10월5일까지 44일간 계속된 전투에서 중국군은 교전 첫날에만 5만 발이 넘는 포탄을 비롯해 무려 47만 발의 포탄을 쏘아댔다.

최병우 기자는 포탄이 쏟아지는 이곳에 현장취재를 자원했다. 그 해 9월11일 포탄이 쏟아지는 금문도에 외국인 기자로서는 유일하게 상륙해 취재를 하다가 교통사고로 부상을 입고 타이베이로 후송됐으나 아픈 몸을 이끌고 26일 다시 상륙을 시도하다 종적이 끊긴 것이다.

최 기자는 한국언론의 권위 있는 친목, 연구단체인 관훈클럽 창설을 주도하기도 했다. 관훈클럽은 모든 언론인의 귀감이 된 그를 기려 90년부터 '최병우기자 기념 국제보도상'을 시상하고 있다.

손용석기자 st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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