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되면 생각나는 시인이 있다. 낯설지만 구수한 서북 사투리로 고향의 음식과 정을 노래한 백석도 그 중 하나다. 그러나 백석은 1988년 해금 이후에 알려진 경우여서 그런지 시는 좋지만 친밀감은 아직 좀 낮다. 이와 달리 김규동 시인은 가까운 친척 같은 기분이 든다. 이북 고향을 그리는 그의 시와 산문을 자주 읽은 탓일 것이다.
■ 1925년 함북 경성에서 태어난 그는 1948년 김일성종합대학을 중퇴하고 스승인 시인 김기림을 찾아 혼자 월남했다. 3년간을 기약했던 서울살이에서 그는 시인이 됐지만, 38선이 가로막혀 다시는 고향에 갈 수 없었다. 그의 시와 산문에 어머니와 고향, 어려서 올라가 놀았던 느릅나무가 수시로 등장하는 것은 당연했다. 10여 년 전만 해도 추석이 되면 각 신문이 경쟁적으로 그에게 '한가위 특별기고'를 주문했고, 그는 한 번도 독자들을 실망시킨 적이 없을 만큼 언제나 정감과 비감이 어린 좋은 글을 써 주었다.
■ 지난해 9월 28일 타계하기 6개월 전에 낸 구술 자서전 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려준다. 읽고 생각할 줄 알면 모두 시인이 될 수 있다, 삶이 깨끗하면 작품에도 거짓이 없다, 시인이 먼저 자기 시에 울어야 독자도 따라 운다는 게 시업(詩業) 60년이 넘은 그의 지론이었다. 13년 만에 시집 (2005년)를 낼 때, 그는 이미 발표한 400편 중에서 317편을 버렸다. 아깝지 않으냐고 묻자 "그땐 시로 알고 썼지만 지금 보니 시가 아니라서 버릴 수밖에 없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 민주화에도 크게 기여한 그는 모든 부문의 통일을 염원했던 사람이다. '꿈에 네가 왔더라/(중략)/너는 울기만 하더라/내 무릎에 머리를 묻고/한마디 말도 없이/목놓아 울기만 하더라/(하략)'. 그가 어머니가 되어 쓴 다. 63년 만에 혼으로 귀향한 그는 어머니를 만나 라는 시처럼 '(전략)내 어머니시여/놀다 놀다/세월 다 보낸 이 아들을/백두산 물푸레나무 매질로/반쯤 죽여주소서 죽여주소서'라고 했을까? 1주기를 맞아 27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추모 모임이 열린다.
임철순 논설고문 yc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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