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도를 철천지원수로 여기는 유생들은 남대를 서일수가 이루었다 하여 서대(徐隊)라고도 불렀다지요. 갑오년 난리 때에 남대의 대장이 된 김봉집은 일찍이 이신통이 다리를 놓아서 대행수와 만났고, 자신의 천지도 입도를 용무지지(用武之地)로서의 터전으로 생각했다고 그랬지요. 처음부터 세상을 변혁할 뜻을 품고 기꺼이 도에 입문했던 것이지요. 그는 법무아문 재판소에서 심문받을 적에 천지도는 마음을 닦아 충과 효로써 근본을 삼고 나라를 보위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려는 것이었음을 주장했지요. 또한 우리 도는 하늘의 마음을 지키고 받드는 것이어서 심신을 바칠 수 있었다고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전라도에서는 여러 대행수들이 나왔는데 이들이 하나로 연결된 것은 임진년 삼례의 교조 신원 모임에서였습니다. 물론 저도 당시에 삼례에 갔습니다. 교조 신원 활동은 처음에 서일수 대행수의 주장으로 시작되었는데 신사께서는 예전에 임효의 과격한 활동으로 십여 년 동안 포교의 지장을 받았고 관으로부터 서학보다 더한 탄압을 받았던 전례를 들어 이를 만류했습니다. 사실 남도에서는 죽다 못하여 민란을 일으켜서라도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던 차에 울고 싶은 때에 뺨 때려주는 격이었거든요. 충청도 전라도의 관아에서는 천지도 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잡아 가두고 형장을 가하며 유배형에 가산 몰수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던 것입니다. 충청도 한 고을에서만도 형장을 당하여 죽거나 재물을 빼앗긴 자가 만여 명에 이른다 하였습니다. 그러니 고향을 떠나 가족이 생이별하고 타관 객지로 떠도는 이가 부지기수였지요. 전라도는 관의 탐학이 더욱 자심하여 각 고을마다 탐관오리들의 화를 당하여 죽어나가는 백성들이 넘쳐났습니다.
서 대행수 등 도인 천여 명이 의관 정제하고 엄숙하게 열을 지어 충청도 감영인 공주 관아로 들어가 건의문을 올렸고, 충청감사는 각 고을 수령들에게 천지도인에 대한 횡포와 침탈을 금하고 편히 생업을 영위케 하라는 하명까지 내렸지요. 우리는 다시 닷새 뒤에 각 지역 대두 행수들을 삼례역에 모이라 했는데 이때에도 서 대행수가 앞장을 섰고 고부 행수 김봉집도 나섰지요. 전라감사에게 건의문을 제출할 때에 김봉집이 자원하여 갔습니다. 전라감사 역시 각 고을 수령들에게 천지도인들의 가산을 탈취하는 것을 금하라는 하명을 내렸습니다. 교주 신원에 대하여는 양도의 관찰사 모두 언급하지 않았고 지방 고을에서의 교도 침탈도 여전했으므로 해를 넘겨 계사년 정월에 한양에 올라가 복합 상소할 준비를 했지요.
선발대로 서일수와 김봉집과 이신통이며 저도 올라갔고 상소의 전면에 나설 한양의 몇몇 행수와 각 지방의 젊은 도인들이 많이 참가했습니다. 서 대행수와 신통이나 저 같은 사람들은 관의 기찰에 드러난 바 있어서 애오개 경주인 집에 머물며 한양 거사의 봉도소를 운영하기로 했지요. 한편 김봉집은 대원군 댁에 식객을 살았던 적이 있어 은밀하게 그를 찾았던 모양입디다. 그가 말하기를 '나의 뜻은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한번 죽고자 하는 바외다'라고 하였다는데 대원군 측은 그들대로 우리를 이용하여 정국의 변화를 꾀하였으나 서로 때가 맞지 않은 듯합니다. 이월 열하루 날 아침에 아홉 사람이 소장을 받들고 광화문 앞에 자리를 폈고 도인 천여 명은 광화문 앞에서 육조거리를 가득 메우고 꿇어앉았습니다. 각자 귀향하여 안업하면 소원을 들어주리라, 하는 임금의 전언이 내려온 것은 오후 늦은 시각이었습니다. 그 전날 밤과 상소를 올린 날 이틀에 걸쳐 서일수와 신통과 근기 지역의 젊은 도인들이 척양척왜(斥洋斥倭)에 관한 방과 괘서를 사대문 부근과 운종가 그리고 피맛골에 이르기까지 수십 장이나 붙였습니다.
연이어 삼월에는 보은에서 교조 대신사 순교 기념을 겸하여 시위를 하였는데 전국 각처에서 삼만여 명이 모여들었습니다. 각 대의 오색 기(旗)와 치(幟)가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펄럭였지요. 이십여 일을 버티었지만 무장한 관군의 위협으로 충돌을 우려하여 자진 해산했습니다. 그러나 이때에 북대와 남대 사람들이 처음으로 의기투합했던 것만은 사실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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