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이 공식적으로 체육이라 공인된 지 이미 오래지만 다른 종목과 크게 다른 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심판이 없다는 점이다. 국내 기전은 물론 세계 대회 때도 선수들끼리만 경기를 진행한다. 그러다 보니 대국 중 크고 작은 분쟁이 일어났을 경우 신속한 대처가 어려워 대국을 일시 중단하고 대회 관계자의 유권 해석을 받아 판정을 내리곤 한다.
입회인 제도가 있지만 일반 체육 종목의 심판과는 기능이나 권한이 많이 다르다. 대국 진행 과정을 바로 옆에서 계속 지켜보다 대국자의 반칙이나 부정행위가 있으면 즉각 개입해서 이를 바로 잡는 게 아니라, 이로 인해 선수 간에 분쟁이 발생했을 경우에 한해 양측 의견을 듣고 판정을 내리는 사후 처리 역할만 담당할 뿐이다. 그나마 입회인은 도전기나 결승전 등 일부 주요 대국에만 배치된다.
바둑은 기본적으로 모든 분쟁에 대해 대국 당사자 간 우선 해결 원칙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기 도중 한 쪽이 반칙 행위를 저질렀을 경우 상대방이 즉시 현장에서 입회인이나 대회 관계자에게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만약 실수로든 고의로든 그냥 넘어 가면 상대의 반칙을 묵인한 것으로 간주된다. 예를 들어 대국자가 패감을 쓰지 않고 패를 따냈을 경우 규칙상 당연히 반칙패지만 상대 선수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국이 계속된다. 이 때 입회인이나 계시원이 옆에서 반칙행위를 발견했더라도 '대국 중 제3자 개입 금지' 원칙에 따라 이 사실을 대국자에게 알려 주면 안 된다.
이 같이 독특한 경기 규칙 때문에 그동안 대국 현장에서 이런 저런 해프닝들이 자주 발생했는데 지난 주에는 한국바둑리그 17라운드 경기에서 시간패 여부를 판정하기 위해 생방송 중인 경기를 일시 중단하고 규정에도 없는 '비디오 판독'을 실시하는 바둑 사상 초유의 사건이 벌어졌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지난 16일 바둑TV 대국실에서 벌어진 신안천일염 3지명 홍성지와 포스코LED 4지명 이호범의 경기 도중 이호범이 마지막 초읽기에 몰린 상황에서 계시원의 "여덟 아홉 열" 소리와 거의 동시에 바둑돌을 놓았다.
과연 어느 쪽이 빨랐는지 정확히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아슬아슬했지만 바둑계에서는 이런 경우 거의 다 시간패로 처리해 왔다. 두 대국자도 당연히 시간패 판정이 나올 것으로 생각하고 잠시 착수를 멈추고 있었는데 다음 순간 예기치 않은 돌발 사태가 벌어졌다. 갑자기 계시원이 "아홉 다음 열을 부르는 속도가 조금 빨랐다. 죄송하다. 대국을 계속 진행해도 되겠나"라고 두 대국자에게 물어본 것. 이는 물론 전혀 불필요한 발언이다. 설령 사실이 그렇다 하더라도 해당 선수가 이의를 제기할 일이지 계시원이 먼저 나서서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 두 선수가 잠시 어리둥절해서 아무 대답이 없자 대국 속개에 동의한 것으로 판단했는지 잠시 후 이번에는 홍성지의 초를 읽기 시작했다.
그러자 홍성지가 즉각 초읽기를 제지하고 이의를 제기했다. 이에 따라 당시 주조정실에 있던 바둑리그 운영위원(담당 PD)이 대국장으로 들어가 계시원으로부터 확실히 "열"까지 초를 읽었는지 여부를 확인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호범의 시간패다.
한데 이 순간 또 다른 돌발사건이 발생했다. 홍성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슬그머니 자기 돌을 하나 집어서 바둑판 위에 올려놓은 것. 그러자 검토실에서 모니터를 통해 이를 지켜본 이상훈 신안천일염 감독이 즉각 "대국자가 다음 착수를 했으므로 대국 속개에 동의한 것"이라고 주장했고 이에 대해 김성룡 포스코LED 감독은 "무슨 소리냐, 홍성지가 이미 오래 전에 대국을 중단시키고 이의 제기를 한 상태이므로 당연히 이호범의 시간패다."라고 반박했다.
양측의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자 담당 PD와 양 팀 감독이 한참 동안 논의 끝에 비록 대회 규정에는 없지만 참고로 대국 녹화 테이프를 되돌려 보기로 했다. 비디오 판독 결과 이호범의 착수가 "열" 소리보다 조금 빨랐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후 대국자의 합의로 대국이 속개됐는데 공교롭게도 사건 발생 직전까지 형세가 꽤 유리했던 홍성지가 심리적으로 크게 흔들렸는지 이호범에게 역전패를 당했다. 사건은 일단 이렇게 마무리됐다.
하지만 당시 바둑TV를 통해 이 과정을 지켜본 시청자들과 네티즌들로부터 판정에 대한 찬반 논란이 잇따랐고 사건 처리 과정이 잘못됐다는 의견도 많았다. 이에 따라 바둑리그 운영위원회(위원장 양재호 한국기원 사무총장)는 다음날 긴급회의를 열어 "이호범이 '열' 소리와 동시에 착수했으므로 시간패에 해당하지만 운영위원이 상황을 파악하는 도중 다시 홍성지의 착수가 이뤄졌고 이후 쌍방 합의로 대국을 계속했으므로 승패를 번복할 수 없다."고 최종 결론을 내렸다. 또 "대회 관계자들의 미숙한 경기 운영으로 TV시청자들에게 불편을 끼치고 바둑팬들에게 실망을 안겨 죄송하다"는 내용의 공식 사과문을 발표하고 유사한 사퓽?재발 방지를 위해 10월초에 열리는 준플레이오프부터 모든 바둑리그 경기에 입회인을 배치하겠다고 밝혔다.
박영철 객원기자 inra36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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