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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백가흠 장편소설 '나프탈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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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백가흠 장편소설 '나프탈렌' 출간

입력
2012.09.21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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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프탈렌/백가흠 지음/현대문학 발행ㆍ308쪽ㆍ1만3,000원

김기덕 영화가 주는 불편한 감흥을 한국소설에서 맛보려는 독자는 백가흠의 작품을 읽으면 된다. 소설 속 에피소드는 다 다르지만, 인물들은 대개 가학적인 남자와 학대받는 여자이고 남자는 그 가학으로 인해 더 불행해지고, 여자는 그 학대를 묵묵히 감내한다. 이 사도마조히즘의 풍경은 우리가 살고 있는 부조리한 세계의 끔찍함을 무대화한다. 그러니 백씨의 소설이 '영화감독 김기덕의 집요함을 닮았다'(문학평론가 신형철)는 비유는 허황된 수사가 아니었다.

백가흠의 장편소설 <나프탈렌> 은 이전의 극서사(극단적 상황을 설정한 이야기)보다 한결 편안한 이야기다. 죽음, 구원에 관한 작가의 문제의식은 그대로지만 설정된 상황과 묘사는 훨씬 순화됐다. 지난 해 첫 장편소설 '향'을 쓴 뒤 해설까지 받은 상태에서 출간을 취소하고 생긴 변화다. 19일 만난 백씨는 "첫 장편소설이라 오래 준비했고 공부도 많이 했지만, 교정 볼 때 다시 읽으니 가독성이 없어 출간을 무기한 연기했다"고 말했다. "향은 평론가들이 좋아할 소설인데, 잘 읽히지가 않았어요. 왜 썼는지 모르겠더라고요. 문학상 받고 싶어서 썼는지 자문하게 되고요. 이번 소설 쓰면서는 쉽고 잘 읽히고 간단한 얘기를 하자고 생각했죠."

폐암에 걸린 이양자와 엄마 김덕이 여사가 하늘수련원에 들어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양자는 폐암 말기 선고를 받기 직전 남편이 어린 제자와 바람을 핀 사실을 알게 되고 삶을 정리하려 하지만, 김덕이 여사는 자신의 몸이 망가지는 줄도 모르고 딸을 위해 매일 동분서주한다. 수련원 원장은 자신의 노망 난 노모를 모질게 대하지만 정작 노모가 개울가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자 정신을 놓아버린다. 탈북자 출신의 수련원 인부 최영래는 이 혼란을 틈타 도박을 하고, 도박판에서 일방적으로 돈을 딴 김씨를 살해하면서 수련원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소설의 배경인 '전주 근처 만공산 하늘수련원'은 신인시절 백씨가 글을 쓰기 위해 찾았던 진안 만덕산의 한 수련원을 모델로 했다. 이 밖에도 소설 곳곳에서 작가 주변의 인물, 겪었던 일화가 변형돼 등장한다. 예컨대 김덕이 여사는 작가의 고모가 모델이고, 소설의 다른 한 축인 백용현 교수는 학계 원로들의 권위적인 이미지를 섞었다. 백씨는 "김덕이, 이양자 모녀와 백용현 교수 이야기가 소설 말미에서 겹치는 걸 구상하고 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때 아버지의 죽음을 본 이후 평생을 죽음에 관한 트라우마에 시달린 백 교수는 불안에서 벗어나고자 노년까지 젊은 여자의 몸을 탐한다. 하지만 30년 만에 재회한 전 부인 손화자의 죽음을 겪으며 다시 한번 죽음의 공포에 직면한다. 백 교수의 조교 공민지는 대학시절 사귀던 애인이 다른 여자와 결혼한 후에도 일 년에 한두 번씩 만남을 가지고, 이 사실을 안 애인의 일본인 아내는 공민지에게 눈물로 호소하다 일본으로 떠나고 만다. 이 일로 공민지 역시 정신적 혼란을 겪게 되며 백 교수의 고독과 방황을 이해하게 되고, 백 교수는 공민지와의 만남을 통해 죽음에 대한 공포를 털고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이른다.

소설은 작가의 바람대로 쉽고 잘 읽히지만, 결코 간단한 이야기는 아니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며 다양한 인물들이 만드는 사건, 그들이 지닌 각각의 사연과 상처를 통해 죽음과 소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시인 이원의 추천사처럼 '따뜻한 피가 도는 그로테스크'란 말이 어울린다. 백씨는 "다른 버전의 결말을 쓰기도 했지만, 소설 앞부분의 분위기와 맞지 않아 인물들이 각자 상처에서 회복하는 결말로 끝냈다"고 말했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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