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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시계바늘 30, 40년전 돌린듯… 애잔한 그리움에 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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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시계바늘 30, 40년전 돌린듯… 애잔한 그리움에 젖다

입력
2012.09.19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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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 단위로 시간 여행을 한다. 노을의 끝자리쯤에서 한가로이 어망을 던지는 베트남 노인. 그의 어깨에 걸린 피곤은 한국의 어느 시골 노인과 닮았고 또 닮지 않았다.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여긴 또 프랑스다. 붉게 그을린 피부를 스스럼없이 내놓은 프랑스 여인들이 자전거에 먹거리를 잔뜩 싣고 하이 톤의 수다를 떨며 옆을 스쳐간다. 세느강 대신 도시를 가로지르는 붉은 투봉강이 이곳이 파리가 아닌 호이안임을 말해줄 뿐이다.

몇 걸음 옮기면 베트남 전통음식 까오라우(Cao Lauㆍ돼지고기 편육을 넣은 비빔국수)를 들고 있는 중국인들의 왁자지껄한 젓가락질이 한창이다. 지붕의 금박이 적절히 떨어져 나가 더 중국인 듯한 건물의 처마 아래 가장 중국적인 풍광이 이어진다. 그 옆으로 흑인 남성 무리들이 힙합의 아우라를 걸음 걸음 박으며 갤러리에 들어간다. 베트남 전통의상 아오자이를 입은 참한 여성이 그림의 가격을 말한다. 과장된 몸짓의 흑인 청년은 여인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거친 악수와 함께 달러를 건네면서 싱긋 웃는 모습이 심지어 귀여워 보인다. 지나가던 일본 학생들은 아이폰으로 그들의 모습을 깔깔대며 찍는다.

경쾌한 억양의 베트남어 사이로, 노래 같은 리듬의 불어가 흐른다. 1953년에 지어진 내원교(Cau Lai Vienㆍ꺼우 라이 비엔)라는 다리를 사이에 두고 일본어와 중국어가 넘실댄다. 어설피 해가 꼬리를 감추는 '개와 늑대의 시간' 속에 영어 혹은 한국어, 혹은 이탈리아 말이 유려하게 넘쳐난다. 베트남 중부. 과거 국제 해상무역의 중심지였던 호이안의 구시가지 거리. 전쟁의 참화도 비켜 간 180년 전의 옛 건물들이 이처럼 세상엔 없을 풍경을 만들며 온갖 지구인들을 평화롭게 안고 있다.

호이안은 16세기 상인들이 계절풍에 의존해 바다를 건너다 잠시 쉬어가는 도시였다. 호이안은 중부지방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베트남 국토의 특성상 바다와 인접해 있지만, 호이안강·투봉강 등 34㎞에 이르는 수로, 다낭과 연결된 뱃길로 예로부터 '바다의 실크로드'라고 불릴 정도로 교통의 요지였다. 자연히 17~19세기 들면서 국제무역의 중심지로 발전했고 인도, 포르투갈, 프랑스, 중국, 일본 등에서 온 상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발전의 산물은 건물로 고스란히 남아, 같은 블록 안의 거리에도 일본, 중국, 프랑스풍 건물들이 기묘하게 공존하고 있다. 1~2m 정도 높이의 차이가 있을 뿐 180년이 넘게 보존된 고건물들은 누구 하나 뽐내지 않으며 국적을 알 수 없는 편안함을 선사한다. 유네스코가 1999년 호이안 거리의 건축·문화인류학적 가치를 인정해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는 점은 그저 참고할 내용에 지나지 않는다. 누가 인정해주지 않아도 호이안의 거리는 여행을 온 인간들이 받을 수 있는 가장 다양하고 평화로운 시간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이름 좀 있는 동남아 여행지 어디에나 있는 호객행위도 찾아 볼 수 없다. 길거리에서 기념품을 파는 할머니들은 다소곳이 손짓을 할 뿐 큰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투봉강에 띄울 연꽃등과 열대과일을 파는 아주머니들도 조용히 손짓으로 "노 땡큐"라는 신호만 보내면 보살과 같은 미소로 옆을 스쳐간다. 세계 어디를 가도 있다는 스타벅스 등 유명 커피 브랜드도 입점하지 않았다. 10명이 앉으면 꽉 찰 작은 카페에서 인상 좋은 동네 아저씨가 달콤한 베트남 커피를 팔고, 네덜란드인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에선 베트남 맥주 라르(Larue)를 팔 뿐이다. 아마추어 작가의 재기 넘치는 유화들이 수백여 개의 갤러리를 채우고 있으며, 차량 통행을 제한한 거리에는 인력거 사이로 소소한 대화만이 흐른다. 자동차가 아닌 자전거 속도로 흐르는 감성이 충만할 뿐이다.

낮의 호이안은 기념품을 팔고 외국인이 많으니 인사동을, 예쁜 카페와 오래된 건물이 많으니 삼청동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어둠이 내려 앉은 호이안의 밤은 한국의 그 어떤 곳에서 느낄 수 없는 애잔함을 선물한다. 누군가의 소원을 담아 강 위로 떠 다니는 은은한 연꽃등의 불빛과 나지막이 내려 앉아 카페를 밝히는 오랜 건물의 자태. 호치민, 하노이의 시끄러운 밤은 아직 호이안에는 없다.

성장하지 못한 도시의 속살과 아직도 순박한 베트남 사람들의 표정은 1970~80년대 한국을 떠올리게 한다. 성실하고 근면한 그들의 그림자가 화려한 듯 여유로운 밤 내음과 불빛 뒤로 너울거릴 때 슬픔과는 다른, 그리움에 가까운 애잔함이 라르 맥주의 알싸함으로 절정에 오른다. 10시가 넘으면 조용해지는 밤 거리에는 이제 외국인 관광객들만 남았다. 짧은 영어로 서로의 추억을 공유하는 그들은 새벽부터 열심히 일했을 베트남인들의 잠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만 떠들고 있다. 호이안의 밤을 즐기는 예절을 알고 오기라도 한 것처럼.

■ 여행수첩

●대한항공(주4회ㆍ월,목,금,일요일)과 아시아나항공(주3회ㆍ월,수,토요일)이 인천국제공항과 다낭국제공항 직항노선을 운영한다. 다낭까지 비행시간은 4시간 30분 ●한국보다 시차는 2시간 느리다. 연중 고온ㆍ다습해 짧고 편안한 복장이 필수다. 비자는 필요 없다. ●가을과 겨울에 베트남을 방문하면 할인 가격에 여행을 즐길 수 있다. 하나투어가 관광형 다낭-호이안-후에 5일 상품(79만9,000원부터)과 가족여행 등으로 적합한 휴양형 다낭-호이안 6일 상품(109만9,000원부터)을 판매한다. 1577-1233

호이안(베트남)=글ㆍ사진 정재호기자 next88@hk.co.kr

■ 특급 휴양지 변신한 '다낭'… 전흔속 옛영화 간직한 '후에'

베트남의 발전 속도는 눈부시다. 베트남전쟁 당시 미국과 한국 해병대가 주둔했던 베트남 제3의 도시 다낭에서는 자전거와 오토바이의 물결에서 발전하는 도시의 근력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공항을 떠난 지 20여분. 백색 해안선 사이로 5성급 호텔과 리조트가 이어진다. 카지노가 있는 크라운 프라자호텔을 비롯해 하얏트, 아나만다라 등 최고급 호텔과 선라이즈 호이안 비치 리조트가 모습을 내민다. 비슷한 동남아 여행지에 비해 가격이 저렴해 한국인 관광객들의 숫자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게 현지 관계인들의 설명이다.

휴양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어루만진 뒤, 대리석으로 만든 마블마운틴(오행산)과 베트남의 '앙코르와트'라 불리는 미손 유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미손 유적은 힌두교의 시바신을 모신 곳이다. 베트남전쟁 중 미군의 폭격에 파괴된 채 방치 돼 복원이 한창이다. 상태가 양호한 유적들은 다낭 시내에 위치한 참조각 박물관에서 관람이 가능하다.

베트남의 경주로 불리는 '후에(Hue)'의 왕궁에 들어서면 수많은 상념이 스쳐간다. 중국에게서 황제 칭호 사용을 허락 받은 응우엔 왕조(1802~1945)의 금빛 찬란한 터전이지만, 이곳 역시 베트남전쟁으로 파손된 70여 동의 건물을 복원 중이다. 1993년 베트남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터만 남은 곳에 가꿔진 넓은 잔디밭과 고즈넉한 나무 숲길이 청명하다. 그 기분으로 베트남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카이딘 왕릉의 화려함까지 눈에 담는다.

여행의 마침표는 후에 시내에 위치한 '여행자의 거리'에서 찍는다. 놀랍게도, 이 거리의 지배자는 K팝이다. 슈퍼주니어가 간판 스타이고, 싸이의 강남스타일의 인기도 높다. 출신 국가를 막론하고 싸이 노래 전주만 나오면 모두가 일제히 '말춤'을 추는 신기한 광경도 지금 가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다낭ㆍ후에=글ㆍ사진 정재호기자 next88@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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