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발전소 건립 관련 업무를 위해 서아시아권의 국가로 파견된 친구와 통화를 했다. 현지 생활에서 불편한 점이 무엇인지 물었더니 두 가지를 대답했다. 답답한 인터넷 속도, 그리고 아침, 저녁으로 각각 5시간 정도만 공급되는 전기 사정. 내가 지금 한국에서 살고 있는 것이 다행이라는 안도와, 한편으로는 제한 송전이 남의 나라 일만이 아닐 수 있다는 우려가 교차했다.
작년 9월 15일에 있었던 대규모 순환정전 사태는 엄청난 재산 피해와 더 이상 우리나라도 전력수급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준 초유의 사건이었다. 그 후 1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전력수급상태에 대해 국민들의 관심도가 높아지고 위기상황을 피부로 느낄 수 있게 됐다.정부 차원에서는 정전대비위기대응훈련 실시, 비상단계별 대국민 전파시스템 구축, 전력예비율 상시 표시, 가정용 실천매뉴얼 배포 등 여러 가지 대응책을 수립하는 계기가 됐다. 특히 올해 온 국민이 정전대비위기대응훈련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결과, 500만kW 이상을 절감하기도 했다. 이는 화력발전소 10기에서 전기를 생산하는 것과 맞먹는 정도의 전기를 절감한 것으로 개개인의 참여가 얼마나 큰일을 이루어 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국내의 전력수급은 냉·난방에너지의 사용량이 급증하는 여름 겨울철이 가장 큰 문제이다. 이때의 전력수급이 가장 불안하고 국민 개개인의 협조가 요구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전기는 그 어떤 에너지보다 품질이 우수하며 사용하기 쉽고 싼 가격으로 인해 가정에서도 그 수요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편리하다는 이유로 가스설비대신 인덕션으로 불리는 전열조리기구 등의 설치가 늘어나고 있으며 낮은 출산율로 가족 구성원 수는 점차 감소하나 대용량 가전제품의 판매는 오히려 증가하고 있는 것은 전력수급 측면에서 심히 우려되는 상황이다. 개개인의 편의 추구나 선호도 자체를 무조건 문제 삼을 수는 없지만 이러한 선택들이 모여 국가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면 이는 궁극적으로 개인의 문제로만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전기에너지 절감을 위한 노력은 여름 겨울철에만 잠깐 관심을 갖는 정도가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몸에 밴 습관처럼 이뤄져야 한다. 그 방법 중 한 가지가 에너지소비효율 등급이 높은 가전제품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에너지절감을 위한 합리적 선택을 도와주는 툴이 바로 에너지효율등급라벨이다. 1992년 최초 시행된 이후 현재 30여개 제품군에 의무적으로 부착되고 있는 에너지효율등급라벨은 필수항목인 에너지효율등급 외에도 에너지 사용비용, CO2 발생량 등 구매때 뿐만 아니라 사용할 때에 고려하면 좋을 유용한 정보를 담고 있다.
그동안 높은 에너지효율등급을 획득하기 위한 국내 제조사의 끊임없는 연구, 노력의 결과로 주요 가전분야 에너지효율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해 있고 이를 기반으로 품질 역시 해외 매출액과 소비자평가 등을 통해 입증됐다.
이처럼 소비자가 효율등급이 높은 적정 용량의 제품을 구매하고 전력피크시간대인 하절기 오후 2~5시, 동절기 오전 10시~낮12시, 오후 5~7시를 피해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국가차원의 전력수급 관리에 큰 힘이 될 수 있다. 아무리 좋은 취지의 제도와 시스템이 운영되고 있더라도 국민 개개인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참여가 없으면 이는 불필요한 규제로 전락할 수 있다. 에너지효율등급 라벨이라는 유용한 툴을 잘 활용한다면 현명한 소비와 효율적 제품 사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고 전기에너지 절감에도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미래에 누군가가 우리 아이들에게 한국에서의 생활 중 불편한 점이 무엇이냐고 물어볼 때 고개를 숙이고 조그만 목소리로 부족한 전기사정이라는 대답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관심과 노력 여부에 따라 미래 아이들의 대답이 바뀔 수 있다.
서상민 한국산업기술시험원 에너지기술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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