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과 '묻지마 폭력'과 같은 범죄들이 연일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제 우리는 언제 어디서 괴물이 뛰쳐나와 나에게 칼을 휘두르고 내 어린 자식을 납치해서 잔인하게 유린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 더구나 이 괴물이 저 멀리 산 넘고 물 건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이웃이라고 하니 불안은 한층 가중된다. 아무도 아무를 믿을 수 없는 세상이 된 것처럼 보인다. 이번 나주에서도 "삼촌이니까 괜찮아"라고 성폭력범이 말했다는 것처럼 이웃이나 친척이 상처를 주지 않는 감정적 결속이기는커녕 외려 범죄의 통로가 되고 그 범죄를 은폐하는 압력이 되었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러다보니 일상생활에서도 낯선 사람뿐만 아니라 이웃을 경계하는 눈초리도 역력하다. 이웃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눈을 감거나 못 본 척 해야 한다. 괜히 아는 척 하거나 간섭하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남을 대하는 일상적 태도는 '외면'이다. 우리에게 이웃과 같은 사회적 결속은 문제의 해결지점이 아니라 문제가 되어버렸다.
'외면'하는 대신 우리는 국가가 그 자리를 채워주기를 바란다. 이런 문제는 내가 아니라 경찰이 나서서 해결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경찰이 이웃을 대체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경찰과 국가를 내 이웃의 자리로 끌어들일수록 우리는 내가 보호되는 것이 아니라 감시당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경찰은 나를 위해 내 이웃만 감시하다는 것이 아니다. 나는 경찰이 내 든든한 이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경찰에게 나는 또 다른 '잠재적 범죄자'일 뿐이다. 경찰은 내 이웃을 위해 나를 감시하기도 있다. 내가 사는 집 앞뒤좌우가 다 경찰서라고 생각해보라.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동네에서 자신이 살고 있는지를. 이게 '경찰국가'이다.
우리는 지금 이웃이 할 일을 국가가 하고 국가가 해야 할 일은 이웃이 하는 완전히 뒤집힌 세상을 살고 있다. 이웃은 이웃이 해야 할 일을 외면하고, 국가는 국가가 해야 할 일을 외면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가 해결할 일과 사회가 해결할 일은 구분하고 각각 자신의 몫을 하는 것이다. 우선 정치가 해야 하는 일은 이웃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폭력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것이다. '묻지마 폭력'이나 '자포자기 범죄'는 시장에 의해 파괴된 삶의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런데 우습게도 국가는 자신이 맡아야할 이 역할을 '사회'에 떠넘기고 있다. 대형마트들이 들어오면서 동네상권은 망해 가는데 '동네 창업'을 대안이라고 떠들며 지원하겠다는 것이 지금 정치가 하는 일이다.
국가가 제 몫을 찾는다면 우리 역시 해야 할 제 몫이 있다. 이웃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직면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웃됨의 '위험함'과 불안에 직면해야한다. 이웃에 대한 우리 감정은 '이웃이니까 더 위험하다'와 '이웃이니까 차마 말을 못 한다'로 분열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한편에서는 만남을 회피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막 만지는' 황당한 관계가 공존한다. 따라서 서로에게 언제든 위험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상처를 주지 않는 유대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위험을 서로에 대한 존중으로 바꾸는 길이 된다. 이렇게 유대감을 갖고 서로의 감정을 돌보는 존재를 우리는 이웃이라고 부른다. 지금 붐처럼 일어나고 있는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이 그저 '경제적 활동'이 아니라 사회적 결속의 새로운 형태인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게 도대체 폭력을 막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냐고 묻겠지만 서로 이웃으로 결속한 자리에 폭력이 들어설 여지는 그리 많지 않다. 그것은 폭력을 휘두른 자에게도 곧 추방이며 사회적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위험을 존중으로 바꾸는 사회적 결속이야말로 서로를 '보호'하며 사회문제들을 치유하게 한다. 우리의 삶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위험에 대한 위협이 아닌 '상처받을 수 있음'에 대한 존중에 바탕을 둔 '사회적인 것'의 재구축이다.
엄기호 교육공동체 벗 편집위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