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대, 바람을 아는가 안개를 아는가… 삽시간의 황홀을 펼쳐내는"
사진작가 김영갑은 1957년에 태어나서 2005년에 죽었다. 그 사이의 시간을 그는 애오라지 사진으로만 남겼다. 빛의 입자가 필름에 닿아 번지는 사태는 보는 이뿐 아니라 기실 찍는 이의 언어로도 포착할 수 없는 것이어서, 이 글은 그의 사진, 아니 삶에 대한 어긋난 췌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릅쓰고 쓴다. 그가 평생 기록한 제주도 중산간의 빛과 바람이라는 명작에 대해서. 무척이나 과묵해 살아서도 들을 기회가 흔찮았던 작가의 목소리를, 그가 죽은 뒤 엮은 몇 권의 책_<김영갑> (다빈치ㆍ2006), <그 섬에 내가 있었네> (휴먼앤북스ㆍ2009년 발행 2판), <김영갑: 김영갑 5주기를 추모하며> (휴먼앤북스ㆍ2010)_에서 뽑아 홑따옴표 안에 넣었다. 그의 제자였던 사진작가 박훈일씨가 자신의 기억을 덧붙였다. 김영갑:> 그> 김영갑>
눈빛
딱 한 번 그를 본 적이 있다. 2005년 음력 설 무렵, 중산간 도로를 따라 제주를 여행할 때였다. 그의 작업실이자 집인 두모악갤러리는 서귀포시 성산읍 삼달리에 있다. 제주 올레가 아직 없던 때라 중산간 지역엔 외지인의 발길이 매우 뜸했다. 갤러리도 텅 비어 있었다. 폐교를 개조해 만든 그곳에서 그의 방은 서무실쯤 됐을 법한 출입구 바로 곁방이다. 병이 깊었던 그는 뒤로 젖힌 의자에 기대 담요를 덮고 창 쪽으로 앉아 있었다. 찡그린 얼굴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그가 잠들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창을 투과해 들어오는 햇살의 기울기를 헤아리는 듯, 주름에 묻힌 눈꼬리가 긴장돼 있었다. 벽에 걸린 작품보다 감은 눈 속에서 느껴지는 그의 시선이 기억에 남았다. 석달 뒤 신문 귀퉁이에서 그의 부음을 접했다.
'안개가 일순간에 섬을 뒤덮는다. 하늘도, 바다도, 오름도, 초원도 없어진다. 대지의 호흡을 느낀다. 풀꽃 향기에 가슴이 뛴다. 안개의 촉감을 느끼다 보면 숨이 가빠온다. 살아 있다는 기쁨에 감사한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도, 끼니 걱정도 사라진다. 곰팡이 피어가는 필름 생각도, 홀로 지내는 외로움도 잊는다. 촉촉이 내 몸 속으로 안개가 녹아내린다. 숨이 꽉꽉 막히는 흥분에 가쁜 숨을 몰아쉰다. 자연에 묻혀 지내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이 기쁨, 이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다.'
김영갑은 사진 작업의 대부분을 제주 중산간 지역에서 진행했다. 중산간은 한라산 수림과 해안 사이, 해발고도 200~600m의 구릉지대를 지칭하는 말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 관광객은 해변으로만 몰렸고 몇몇 유명한 오름을 제외하면 중산간은 풀어 키우는 소와 말의 터전이었다. 화산석이 풍화된 대지는 본래 짙은 흑갈색이다. 하지만 봄이면 유채꽃이 피고, 여름엔 사람이 씨 뿌려 키운 작물과 저절로 자란 풀이 윤택한 녹색을 겨룬다. 가을이면 억새의 물결이 일고 겨울엔 순백의 세상이 된다. 1980년대 중반, 세상이 알아주지 않던 이십대 작가 김영갑의 섬세한 눈빛은 인적 드문 그곳에 멎었다. 그는 스스로를 그 땅에 묶었다. 터진 구름 사이로 쏟아져 내려오는 햇살과 한 순간 세상을 덮어버리는 안개를, 그는 '삽시간의 황홀'이라고 표현했다.
'사진을 찍는 것은 아침저녁으로 두세 시간 정도다. 사진은 일 초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승부를 거는 처절한 싸움이다. 한 번 실수하면 그 순간은 영원히 다시 오지 않는다. 눈 앞에 펼쳐지는 황홀함은 삽시간에 끝이 난다. 그 순간을 한번 놓치고 나면 다시 일 년을 기다려야 한다. 일 년을 기다려서 되는 거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기다려도 되돌아오지 않는 황홀한 순간들도 있다.'
바람
김영갑의 필름을 감광(感光)케 한 것은 어쩌면 빛이 아니라 바람이다. 그의 많은 작품 속에서 주된 피사체는 바람이다. 카메라를 삼각대에 올려 놓고 긴 시간 셔터를 열어 찍은 그의 사진 속에서 바람은 빛을 산란시키고, 구름을 일으키고, 나무를 흔들고, 인간이 쌓아 올린 풍경들을 안개로 감싸 안는다. 그것은 아름답되 척박하고 몽환적이되 스산하다. 무연히 오름을 쓸고 흐르는 바람의 흔적은 어떤 이에겐 자연의 웅혼함으로 다가왔고, 다른 이의 가슴 속에서 상실감을 증폭시키는 계기로 작동했다. 더러는 깊은 상처에 허우적대는 이에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위안이 되어 주기도 했다. 그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사시사철 들짐승처럼 그는 바람 부는 중산간을 어슬렁, 때로는 허우적거리며 걸었다. 사람들은 그를 "바람에 저당 잡힌 영혼"이라고 표현했다.
'어느 하나에 진득하니 몰입하지 못하고 방방곡곡 바람처럼 떠돌았다. 내 안에서 부는 바람을 어쩌지 못해 바람 타는 섬, 제주에 정착했다. 바람 지나는 길목에서 질기게 생명을 이어가는 나무처럼 풀처럼 시련을 온몸으로 견디며 세상을, 삶을 느끼려 했다. 자갈밭에 씨 뿌리고 거두어도 늘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던 제주 사람들의 생명력을, 바람을 이해하지 않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한겨울 칼바람 속에서도 무자맥질하는 늙은 해녀들의 강한 생명력을, 바람을 이해하지 않고는 헤아릴 수 없다.'
그의 사진에 담긴 제주의 바람은 언뜻 사념을 모두 벗어버린 자의 날숨처럼 보이기도 한다. 2대 1, 또는 3대 1의 넓은 파노라마 스케일로 인화된 그의 사진은 장쾌한 보는 맛을 주지만, 현대의 사진예술이 도달한 관념성의 경계로부터 한참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중적 호감과 달리 그의 예술적 가치를 낮춰보는 시각도 없지 않다. 박훈일씨는 "사진을 정리하다 보면 정말 이제 안 나올 것 같은데도 같은 장소에서 찍은 사진이 또 나온다"며 "치열한 예술적 고민 없이 한 주제를 이렇게 천착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영갑은 35mm 카메라에서 시작해 6X12, 6X17 사이즈 카메라로 옮겨가며 중산간 작업을 계속했다. 어느 정도 작품을 이루면 다음 주제로 이동하는 여느 작가와는 달랐다.
'내가 한라산만을 고집하는 이유를 사람들은 궁금해 한다. 질문을 받을 때마다 대답 대신 웃는다. 설명을 할 수가 없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벌서 다른 곳을 찾아 떠났을 것이다. 뭔가 설명할 수 없기에 한라산 자락에서 이렇게 세월을 허비한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한라산 들녘에서 무엇을 표현하려고 하는가'라는 질문을 나 자신에게 해본다. 고요와 적막, 평화로움… 첩첩산중이나 무인도에서 느낄 수 있는 느낌과는 다르다. 이곳에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평화로움이 있다. 이에 홀린 나는 20대, 30대, 40대를 중산간 들녘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삶
지금 두모악갤러리 관장을 맡고 있는 박씨는 떠꺼머리 고등학생 시절부터 김영갑을 "삼춘"이라고 부르며 따라다녔다. 카메라를 만져보기 전 암실작업만 2년 동안 배운 도제식 제자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김영갑 사진의 주제는 결국 제주 사람의 삶"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좀체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 김영갑의 작품에서 인간의 삶을 읽어내기란 쉽지 않다. 박씨와 함께 1980년대 김영갑의 초기 작품을 몇 점 봤다. 현무암으로 된 무덤이나 동자석, 마라도의 해녀가 거기 있었다. 시선이 풍경으로 옮겨온 후에도, 그래서 그의 사진 속에서 사람의 흔적이 사라진 후에도 김영갑의 가슴 속에는 늘 제주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박씨는 힘주어 얘기했다. 오름의 곡선과 억새를 스치고 가는 바람에서 김영갑은 어떤 얼굴을 읽어낸 것일지 궁금했다.
'20년 전 중산간 오름들에는 찾는 이가 없었다. 온종일 돌아다녀도 사람을 볼 수가 없었다. 운이 좋은 날에나 목동들과 들녘에서 일하는 농부들을 먼발치에서 볼 수 있을 뿐이다. 약초꾼들마저 찾지 않는 중산간 오름은 한가하고 평화로웠다. 이곳의 풍경을 완성하는 이들은 농부들이다. 유채, 감자, 당근, 콩, 메밀, 조, 산디(밭벼), 목초 등… 어떤 곡식을 재배하느냐에 따라 그곳의 풍경이 달라진다. 그들이 만들어가는 삶의 흔적만큼이나 중산간 들녘의 모습은 다채로웠다.'
김영갑의 사진 속엔 맑은 날이 많지 않다. 대신 흐리거나 비가 오거나 강한 바람에 휩쓸리는 중산간의 풍경이 가득하다. 골 깊은 제주인의 역사가 혹시 그의 사진에 영향을 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가장 많은 사진을 남긴 용눈이오름으로 갔다. 아침 이른 시간이라 관광객은 없었고 삼나무가 간간이 심긴 너른 들판은 초가을 제주의 부드러운 바람이 고여 은은했다. 날이 맑아 김영갑의 사진 속에서 본 풍경과는 다른 결의 오름이었다. 그러더니 금세 성산 바다에서 닥쳐온 해무로 세상이 온통 불투명해졌다. 다랑쉬 오름으로 걸음을 옮기니 얼마 안 돼 이른 가을볕이 따가워지기 시작했다. 김영갑은 이곳의 시간이 한 찰나도 정지될 수 없음을, 사진으로 얘기하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유난히 드센 바람에 몸을 가누지 못해 휘고 구부러져 자라난 키 작은 나무는 고통의 눈물 속에서도 꿈을 놓지 않았다. 오름, 어머니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모든 기쁨과 희망과 생명의 굼틀거리는 힘은, 쉬이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은 먼동이 트기 전의 여명이나 땅거미와 함께 밀려오는 이내 속에 본디의 모습을 감추고 있어, 사람들은 눈을 뜨고도 감지하지 못한다. 탐욕에 물들어 진짜 소중함을 분별하지 못하고 빈 껍데기에 쉽사리 유혹당하는 사람들이 어찌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랴. 그러하니, 중산간을 봤다고, 오름을 안다고 얘기하지 말라. 그대가 안개를 아느냐, 비를 아느냐, 구름을 보았느냐.'
제주=글·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 사진작가 김영갑은
김영갑에 대해 듣고자 두모악갤러리를 찾아갔을 때, 관장 박훈일씨는 처음엔 만나길 꺼려했다. 언론이 종종 김영갑의 작품이 아닌 그의 신체적 조건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그는 1999년 루게릭병 진단을 받았다. 이후 '불치병에 걸린 사진작가'라는 휴먼스토리가 그의 작품보다 유명해졌다. 구도자적 자세로 작품을 하는 그에겐 병만큼 그를 힘들게 하는 시선이었다.
김영갑은 1957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났다. 1982년부터 제주도를 오르내리며 사진 작업을 하던 중 제주의 자연과 사람에 매혹돼 1985년 아예 섬에 정착했다. 바닷가와 중산간, 한라산과 마라도 등 섬 곳곳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밥 먹을 돈을 아껴 필름을 사고 배가 고프면 들판의 당근이나 고구마로 허기를 달랬다. 수행이라 할 만큼 영혼과 열정을 모두 바치는 일이었다.
마흔살을 넘기고부터 셔터를 누르는 손이 떨리기 시작하고 이유 없이 허리에 통증이 왔다. 처음엔 오십견이 일찍 온 것이라 생각했다. 루게릭병 진단을 내린 병원에서는 3년을 넘기기 힘들 거라고 했다. 몇 번의 치료 시도가 실패한 뒤 "낭비할 시간이 없다"며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2001년부터 폐교된 초등학교를 개조해 갤러리를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곰팜이 핀 필름과 사진을 위한 일이었다. 두모악갤러리는 이듬해 개관했다.
2005년 5월 29일 두모악갤러리에서 숨을 거뒀다. 그의 뼈는 두모악갤러리 마당에 뿌려졌다. 개관 10주년 기념 전시 '바람'이 8월부터 올해 말까지 이곳에서 열리고 있다.
유상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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