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82ㆍ예일대 종신교수)이 주창한 '세계체제론'은 자본주의의 동학과 역사적 궤적을 설명하는 가장 강력한 이론적 틀로 꼽힌다. 일국 단위 분석을 넘어 중심부와 주변부, 반(半)주변부가 세계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한 덩어리로 움직이는 메커니즘을 밝힌 이 이론은 1970년대 처음 발표된 이래 사회학 역사학 정치학 경제학 등 여러 분야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며 사회과학의 인식론적 혁명에 가까운 획을 그었다.
세계적 석학인 월러스틴 교수가 경희대가 주최한 '2012 피스 바(Peace BAR) 페스티벌'의 국제학술회의에 초청받아 내한했다. 17일 특강, 18일 한국 학자들과의 좌담에 이어 19일 가진 기자 간담회에서 그는 현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와 향후 전망, 한반도와 동북아 정세, 올해 연말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 이르기까지 여러 질문에 신중한 답변을 들려줬다.
반세기 전부터 자본주의가 지속 불가능한 체제라고 주장했고 최근의 세계 금융 위기를 20년 전에 정확히 예측하는 혜안을 보여줬던 그는, "자본주의는 한계에 부닥쳤다"는 진단과 함께 "어떻게 개혁할 것이냐가 아니라 무엇으로 대체할 것이냐가 문제"라며 더 나은 세계를 향한 도덕적 결단과 실천을 강조했다.
"(지금처럼) 구조가 붕괴하기 시작하면 개인의 도덕적 결단과 실천이 중요해집니다.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이 바다 건너 멀리 떨어진 지역에 기후 변화를 일으키는 '나비효과'처럼 개인의 작은 행동도 체계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이후 체제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예측할 수는 없지만, 선택은 우리들 자신에게 달렸습니다."
'문명 전환기의 정치학'을 주제로 다룬 17일 특강에서 그는 새로운 체제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로 (현 상황에 대한) 지적인 분석을 강조했다. 저마다 원하는 세계가 다른 데서 생기는 복잡한 논쟁 속에서 생각하고 토론하는 게 먼저라는 것이다. 그런 다음 도덕적 선택을 하고 그 목표에 다른 사람들을 합류시킬 정치적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결과는 예측할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가 원하는 세계를 획득할 가능성은 기껏해야 50 대 50이지만, 이는 비관주의의 이유인 동시에 낙관주의의 이유이기도 하다"는 말로 특강을 마무리했다.
올해 한국 대선의 돌풍으로 나타난 안철수 현상에 대해서는 "기존 정당 정치에 대한 실망이 제 3의 후보에 대한 기대로 나타난 것"이라고 분석하면서 "이례적인 현상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경우 레슬링 선수 출신으로 미네소타 주지사 재선에 성공한 제시 벤투라, 1992년 대선에 출마했던 기업가 출신 로스 페로를 들 수 있습니다. 한국은 오랜 기간 권위주의적 정권 아래 있다가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쳐 보수세력이 재집권을 한 상태이지요. 안 후보의 장점은 기존 정치의 부정적 유산과 부패에서 자유롭다는 것인데, 정책적으로는 민주당의 문재인 후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동북아 정세에 관해서는 한국과 북한이 가장 큰 변수라고 분석했다.
"한반도를 대하는 미국과 일본, 중국, 러시아의 정책은 매우 명확한 편입니다. 브라질이나 호주 같은 나라가 한국에 간접적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제한적일 겁니다. 한국은 세계체제가 붕괴하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액터(actor)입니다. 북한에는 (김정은의) 새 정권이 들어섰고, 한국은 새 정부가 들어서려고 합니다. 동북아 정세에 가장 중요한 변수라고 할 수 있지요."
자본주의 세계체제론에 관한 그의 연구는 산업혁명과 유럽 중심 세계경제의 형성을 다룬 1974년 제 1권으로 시작해서 지난해 제 4권('중앙집중 자유주의의 승리-1789~1914')까지 나왔다. 앞으로 너댓 권을 더 써서 20세기 자본주의까지 모두 다룰 계획이라고 하니, 여든을 넘긴 고령이 무색한 현역이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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