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12월 대통령선거의 판이 절반쯤 짜여졌다. 민주통합당 경선은 문재인후보의 압승으로 결말이 났다. 마지막까지 후보들 사이에 끼어있던 불편한 앙금은 조만간에 녹아내릴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오늘 오후에는 장외의 안철수후보가 정식으로 출마를 선언한다고 한다. 남은 기간은 불과 석 달 남짓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치에서 석 달은 다른 나라의 3년에 비견할 수 있다. 그새 무슨 일이 일어날지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다. 일찌감치 전열을 정비한 새누리당의 박근혜후보가 아직은 유리하다. 그러나 진짜 게임은 이제부터다. 5년 동안 국정을 이끌 지도자를 뽑는 일, 대한민국 국민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나. . 근년에 나온 프랑스의 젊은 철학자의 책 제목이다. 정치와 선거를 시들하게 여기는 냉소적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 그것이 승리의 관건이다.
새 지도자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덕목은 시대를 내다보는 비전이다. 정치철학과 정책의 초점이 과거에 묶여 있는 사람은 새 시대의 지도자가 될 자격이 없다. 느닷없이 안철수라는 ‘장외인물’이 떠오른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과거 기준으로 보면 지극히 비상식인 일이지만 젊은 세대에게는 막중한 실체가 있는 인물이다. 그러니 정치신인인 문재인과 안철수, 두 후보에 대한 검증도 구태의연한 방식에 의존해서는 효과가 없을 것이다.
어느 틈엔가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은 큰 나라가 되었다. 이제는 단순히 무시할 수 없는 나라가 아니라, 중요한 변수가 되는 나라가 된 것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지도자는 국제적 감각을 갖추기를 기대한다. 그들이 제시하는 정책이 국제적 상식과 기준에 부합해야만 하다. 다른 후보보다 먼저 나선 박근혜씨는 이 점에서 뒤지는 것 같다. 1974년의 인혁당사건에 대한 박후보의 발언만 보아도 그렇다. 군사독재의 암울한 시절에 일어난 ‘사법살인’으로 국제적으로 공인된 사건이다. 우리 법원도 뒤늦게나마 과오를 바로잡았던 사건이다. 이 땅에 정치적 연좌제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박후보 스스로 아버지의 공(功)을 승계하겠다면 과(過)도 함께 수용할 자세를 보여야 한다. 실은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과거사에 관심이 없다. 5ㆍ16과 5ㆍ18의 차이도 명확하지 않고 유신도, 인혁당도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 다만 그들도 과거사의 그림자가 미래를 막지 않기를 바란다. 박후보는 나주 아동성폭력 사건을 계기로 사형제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흉악범에 대해서는 자신도 죽을 수 있다는 경고 차원에서라도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선거를 앞둔 시점에 국민의 공분을 십분 표심으로 전환하겠다는 정치적 계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발언 역시 국제감각과 미래지향성이 모자란다. 문명국가의 세계적인 추세는 사형제를 폐지하는 길을 걷고 있다. 유럽연합에는 사형제의 폐지가 가입의 전제조건이다. 우리나라도 지난 15년 동안 단 한 건도 집행하지 않아 ‘사실상의 사형폐지국가’로 분류되어 있다. 비록 법전 속에는 남아있지만 실제로는 적용되지 않는, 죽은 법이나 마찬가지다. 이 시점에 사형제를 강조하는 것은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실제로 사형을 집행하겠다는 뜻일까. 국제사회의 거센 비난을 개의치 않고 인권위를 탄압해 인권의 적으로 낙인찍힌 이명박정부조차도 감히 엄두 내지 못한 일이었는데도 말이다. 이제 대한민국의 지도자는 국제사회도 유념하면서 언행을 챙겨야 할 때다. 문재인, 안철수 두 후보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내 놓을 정책의 약속들이 실제로 대한민국 국민의 인권과 복리증진에 얼마만큼 기여할지 냉정하게 따져보아야 한다. 이에 덧붙여서 얼마나 국제적 상식에 합당한지도 따져 보아야 한다. 거의 주목받지 못하지만 특이한 법률가, 강지원이 표방하는 매니페스토 선거운동, 그 참신한 발상만은 공감할 수 있다. 그가 내거는 정책공약들은 실제로 당선이 가능한 후보들에게 제공하는 중요한 참고서일지도 모른다.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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