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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계남정미소를 살릴 수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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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계남정미소를 살릴 수 없을까

입력
2012.09.17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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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진안군 마령면 계서리에 있는 계남정미소는 쌀 대신 추억을 찧는 곳이다. 전주에 사는 사진작가 김지연(64)씨가 2005년 다 쓰러져가는 작은 정미소를 사들여 수리한 다음 이듬해 공동체박물관으로 문을 열었다. 김씨는 구식 이발관, 정미소, 새마을운동의 유산인 근대화상회(구멍가게) 등 사라져가는 것들을 카메라로 기록해온 사람이다. 진안에 아무 연고도 없지만, 6년간 주머니를 털어서 혼자 힘으로 이 공간을 운영해왔다.

계남정미소는 마을 입구 옥수수밭을 바라보는 왕복 2차선 길가에 오도카니 앉아 있다. 녹슨 함석 지붕에 허름한 벽체가 예전 정미소 모습 그대로다. 쿵쿵 소리를 내며 돌던 도정기계가 남아 있는 안에다 코딱지 만한 전시실을 만들었다. 한 바퀴 도는 데 열 걸음도 안 된다.

공동체박물관이라고 명패를 단 것은, 옛날 정미소가 마을의 사랑방 구실을 했듯 이곳이 마을의 기억을 보존하고 나누는 공간이 되기를 원해서였다. 낡고 누추한 것들이 여기서는 귀한 대접을 받았다. 김씨는 마령면과 주변 마을 주민들의 묵은 앨범에서 꺼낸 빛 바랜 사진과 집안 깊숙히 처박혀 있던 오래된 물건들을 모아 전시했다. 번듯한 유물은 아니지만 손때가 묻어 사람 냄새 물씬한 그것들은 지금은 호호백발이 된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꽃답던 시절과 살아온 이야기들을 자분자분 들려줬다. 10년 전 인근에 용담댐이 생기면서 수몰된 마을의 옛모습과 이주민들의 오늘을 담은 사진, 거기에 있었던 폐교의 졸업 앨범도 전시했다.

지난해 늦가을 처음 찾아갔을 때 계남정미소는 앞마을 정영수(82) 할아버지가 내놓은 보물을 전시 중이었다. 금전출납부로 삼대째 써온 일용기(日用記), 부친 회갑에 들어온 선물 목록을 적은 물선기(物善記), 집안이 넉넉하던 선대에 부렸던 머슴들의 새경을 적은 고군기(雇軍記)…. 하도 오래 돼서 귀퉁이가 닳아버린 누런 종이에 꼼꼼히 손으로 씌어진 그 기록들만 연구해도 박사논문 한 편은 나올 것 같았다.

올해 6월 전시의 주인공은 마을의 6ㆍ25 참전용사 할아버지들이었다. 김씨가 직접 찍은 사진 속에서 여든 안팎 왕년의 용사들은 기운이 없어 떨리는 손으로 거수 경례를 붙이고 있었다. 개막식날 김씨는 그분들을 모셔와 과일과 삶은 돼지고기를 대접했다. 조촐하지만 흐뭇한 자리였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살아 숨쉬는 박물관을 만들고 싶다는 김씨의 마음이 통했는지, 처음에는 외지인이 무슨 별난 일을 벌이나 하고 떨떠름하던 주민들이 지금은 살가운 이웃이 되었다. 전시를 한다고 하면 뭘 도와줄까 물어보고, 농사 지은 것을 갖다 주기도 한다. 멀리서 구경 오는 사람들이 늘고, 마을을 살리는 문화 활동의 모범 사례로 꼽혀 다른 지역 공무원들이 견학 오는 곳이 되었다.

그런 계남정미소가 10일로 문을 닫았다. 잠정 휴관이라지만, 언제 다시 문을 열지 기약이 없다. 김씨는 말했다."너무 지쳐서 더 이상 끌고 갈 수가 없어요."

기획부터 자료 수집, 사진 촬영, 도록 제작 등 전시에 필요한 모든 일을 김씨 혼자 해왔다. 집이 있는 전주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인 계남정미소에 매일 나오는 것도 일이어서, 관객이 오면 문 열어줄 사람 한 명이 아쉬웠다. 자원봉사자의 도움을 받다가 그도 여의치 않아 겨울에만 문을 닫던 것이 지난해부터는 주말에만 열다 무기한 휴관에 들어가게 됐다.

안타깝다. 6년 간 고군분투해 일으켰고 덕분에 진안의 명소가 됐으니 도와줄 법도 한데, 진안군과 마령면은 계남정미소 살리기에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여러 차례 조금만 힘을 보태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했지만 허사였다고 한다. 김씨는 "문 닫고 며칠 뒤 군청에서 군 홍보용 사진을 찍겠다고 왔다"며 한숨을 쉬었다.

정식 박물관으로 등록하면 지원을 받기 쉽지만, 그러려면 일정 물량 이상의 소장품이 있어야 하고 학예사도 두어야 한다. 하지만 계남정미소는 주로 주민들에게 그때그때 빌려온 것들로 전시를 하기 때문에 변변한 소장품이 없다. 학예사를 고용할 형편도 못 된다. 이대로 영영 문을 닫아야 하나. 지켜보는 마음이 무겁다.

오미환 문화부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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