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이십대 중반의 일이다. 한 어른을 알게 되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당시 이 분의 연세가 지금의 내 나이와 그리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어느 날 나와 몇 친구들을 모아 놓고 일장 훈시를 하시고는, 대뜸 우리 모두에게 인생의 좌우명이 뭐냐고 물으셨다. 이십대 중반이라는 어설픈 나이, 당연히 인생의 좌표로 삼고 있는 멋들어진 문장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었다. 내가 그때 뭐라고 답을 했는지, 전혀 기억에 없다. 그러나 성실히 살아라, 혹은 시간은 금이다 등, 한심한 내 친구들은 하나같이 지루하고 단순하기 짝이 없는 불쌍한 문장들을 읊어댔다. 그건 확실하다. 기억은 때로 이기적이다.
대한민국 청년들의 바보 같은 이야기가 다 끝난 후, 그 분은 혀를 끌끌 차셨다. 나도 그러했는데 그 분이야 오죽하셨을까. "너희들 아무리 어리다고 하지만, 어찌 그리 아무 생각 없이 사느냐. 오늘, 내 인생의 철학을 이야기해줄 터이니 잘 듣고 새기어라." 철학 공부를 시작한 이래 많은 사람들의 술주정에 섞인 인생철학을 대한 후였기에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분의 비장한 표정으로 인해 엉뚱한 기대감이 생겨났다는 것을 밝혀 둔다. 잠깐 망설이던 그 분의 입술이 드디어 열리며 비밀을 쏟아내셨다.
"운 좋은 놈에게는 덤비지 마라, 그게 내 인생의 좌우명이다!" 하마터면 나는 그 자리에서 크게 소리 내어 웃을 뻔 했다. 그러다 갑자기 이 바보 같은 상황이 짜증스러워졌다. 이런 한심한 노인네의 한심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내 한심한 처지라니!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났다. 얼추 그때 내 나이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그분에게 속으로 화를 냈던 내 자신을 반성하면서 감히 고백하거니와, 이제는 그분의 고귀한 인생과 고귀한 철학을 진심으로 이해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 분의 말씀이 맞았던 것이다. 흔히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고들 하지만, 내 주변에는 '운팔기이'니 '운구기일'이니, 심지어는 운이 성공의 93%를 차지한다고 진지하게 주장하는 분도 계시다. 맥락과 근거는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으나, 세상사에서 운이 차지하는 중요성이 꽤나 높고 넓다는 발견은, 나이가 들면서 얻는 소중한 자각 중의 하나인 것 같다.
운, 행운 혹은 우연의 역할에 대한 자각은 여러 면에서 축복스러운 인식이다. 우선 그것은 자신의 행복에 대해 겸손해야 함을 가르친다. 내가 소유하고 누리는 많은 것들은 물론 과거의 피땀 어린 노력들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적절한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면 이 시간 결코 내 손 안에 머무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 타인의 불행 또한 그들이 게으르거나 무능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행운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또한 자신의 불행에 대해 조금 거리를 둘 수 있게 된다. 여전히 나에게 또 다른 행운과 기회가 밀려들어올 가능성이 없다고 누가 감히 단정을 하겠는가. 운 좋은 놈에게 덤비지 말라고 했던 그 분도 스스로 겪은 수많은 패배를 자신의 무능이나 게으름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누구보다 자신감 있고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던 삶이 아니었던가.
물론 행운이 왔을 때 이를 붙잡을 수 있기 위해서는 평소에 노력을 통해서 준비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적인 이야기를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들어왔거니와, 이런 지극히 당연한 말은 사실 별로 대단한 감동을 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 미국의 사상가 에머슨은 "약한 사람은 행운을 믿고, 강한 사람은 인과관계를 믿는다"고 말했다. 만일 그 말이, 인생의 많은 부분들이 정해진 인과관계의 체계 안에, 혹은 적어도 인식 가능한 인과관계의 체계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믿으며 불확실성을 진정한 세계의 한 측면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삶을 그 온전한 모습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의미한다면, 나는 차라리 약한 사람이고 싶다. 나는 여전히 행운을 믿고 또 원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행운을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나누어가졌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이다. 그것은 나누고 나누어도 작아지지 않는 것일 테니까.
김수영 로도스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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