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형제는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처벌의 한 형태였고, 근대 이후 점차 사라지는 추세에 있기는 하지만(푸코의 은 이 과정을 세밀하게 담아내 철학적으로 고찰한 명저다) 여전히 그 존폐 여부를 두고 서로 다른 의견이 상존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만큼 뜨거운 감자이기도 하다. 특히 최근 우리 사회에서 몇몇 흉악 범죄들이 잇따라 언론에 보도되고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사면서 다시 한 번 사형제 존폐를 둘러싼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이 문제는 정치적 이슈와도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어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지만, 적어도 논술문을 쓸 때에는 쟁점에 대한 견해를 분명히 하는 것이 좋다. 자신의 주장에 적절한 근거를 들어서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이 논술문의 기본 전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학생은 글을 시작해야 할 바로 그 지점에서 글을 끝내고 있다. 학생의 글은 그 주장이 뚜렷하지 않고 모호하여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조차 분명하지 않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가령 학생 글의 다섯 번째 단락을 보면 사형을 집행하기 위한 "객관적이고도 분명한 기준"을 마련하자고 말하고 있지만, 논리적으로 이런 기준은 있을 수 없다. 사형제에 대한 여러 진영의 입장과 가치관이 그 출발점부터 근본적으로 다르고, 더욱이 그것들이 서로 모순적인데 어떻게 거기에서 객관적인 기준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인가? 사형제 존폐 문제를 둘러싼 논의에 정치적ㆍ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객관적인 기준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또 같은 단락에서 학생은 재판관의 오심을 방지하기 위해 배심원 재판이 아닌 다른 방법을 통해 재판결과에 정당성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얼핏 듣기에는 타당하게 들리지만 잘 뜯어보면 이 말도 모호하기는 마찬가지다. 도대체 오심을 방지하기 위한 그 "다른 방법"이란 어떤 방법을 말하는 것인지 되묻고 싶다. 재판이 인간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한 오판 가능성 역시 사라질 수 없다. 학생의 말을 최대한 선의로 해석하면 사형제를 유지하면서 재판에 신중을 기하여 오판을 최대한 줄이자는 말로 읽을 수 있는데, 이는 지극히 당연한 말이긴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다.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기에 선언적 수준 이상의 의미 부여가 어렵다.
또 학생은 같은 단락의 마지막 두 문장에서 사형제를 옹호하는 듯하면서도 최장기형을 선고해 사형제도의 단점을 보완하자고 주장한다. "사형제를 실시한다면"이라는 말로 사형제 존치를 전제로 하면서도 바로 다음 문장에서 사형을 선고하지 말자는 것은 모순이다. 사형제에 대해 학생 자신의 주관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글 전체의 주제가 분명하지 않은 한계를 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한계는 마지막 단락에서도 드러난다. 결론 부분은 자신의 주장을 집약ㆍ압축하는 메시지가 들어가야 하는데, 학생이 하고 있는 말은 "객관적이고 이성에 의한 기준에 입각하여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뿐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이는 매우 모호한 말로서, 결국 학생은 글 전체를 통해 의미 있는 발화 행위를 전혀 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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