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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대선 후보 문재인/ 노무현과 변호사 동업부터 비서실장·상주 역할까지 '30년 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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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대선 후보 문재인/ 노무현과 변호사 동업부터 비서실장·상주 역할까지 '30년 지기'

입력
2012.09.17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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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는 '30년 지기'인 노무현 전 대통령과 같은 도전의 길을 걷게 됐다. 인권 변호사 시절부터 인연을 맺어 청와대 수석비서관에 이어 비서실장을 거친 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때에는 사실상 상주 역할을 맡아 마지막을 지켰다. 이어 친노 세력의 절대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그가 저서 <운명> 에서 "운명 같은 것이 나를 지금의 자리로 이끌어 온 것 같다. 노무현 변호사를 만나고 지금에 이르게 된 것도 마치 정해진 것처럼 느껴진다"고 적었다. 지금의 자리로 인도한 사람이 노 전 대통령이라는 고백이다.

출생과 학창 시절

문 후보는 1953년 1월 경남 거제에서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함경남도 흥남 출신으로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거제도로 피난 온 실향민이었다. 문 후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그의 가족은 부산 영도로 이사했다.

문 후보의 유년 시절에 대한 기억에는 가난이 늘 한 켠에 자리했다. 태풍 '사라'가 상륙했을 때 집의 지붕이 날아간 적이 있고 어머니의 연탄 배달을 돕기 위해 손수레를 끌다 내리막길에서 구르기도 했다.

부산의 명문 경남중ㆍ고에 다닐 때 학교 공부보다 독서에 열중했고 <사상계> 와 같은 사회비평잡지 등을 접하며 어렴풋이 사회의식을 키웠다.

그는 재수 끝에 72년 경희대 법대에 진학했다. 대학 시절에는 '반(反) 유신' 투쟁에 나선 운동권 학생이었다. 75년 시위를 하다 구속돼 학교에서 제적되면서 공수부대로 강제 징집됐다. 78년 제대했지만 복학의 길이 막혀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다 80년 '서울의 봄'을 맞아 제적됐던 학교에 복학이 이뤄졌다. 하지만 신군부의 집권에 맞서 민주화 시위에 참여했다가 다시 구속됐다. 그러나 유치장 안에서 사법시험(22회)에 합격 소식을 듣고 풀려났다.

그는 사법연수원 시절 7년간 연애했던 김정숙씨와 결혼했다. 김씨는 그의 대학 2년 후배로 교내 법대 축제에서 파트너로 처음 만났다. 이후 문 후보가 75년 교내 시위에서 최루탄 가스에 실신했을 때 김씨가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준 것을 계기로 본격 교제를 시작했다.

그는 부인 김씨(58)와 사이에 준용(30ㆍ대학강사)씨와 딸 다혜(29)씨 등 남매를 뒀다. 준용씨는 건국대를 거쳐 미국 파슨스 디자인 앤드 테크놀로지 스쿨에서 석사를 받았다. 다혜씨는 전업 주부이며 남편은 회사를 다니다 미국 로스쿨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 다혜씨는 아버지 문 후보의 대선 출마를 반대했다고 알려져 있다.

노무현과의 만남

문 후보는 82년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수료하면서 판사를 지망했으나 시위 전력으로 임용되지 못한 뒤 변호사의 길을 위해 부산으로 간다. 박원순 서울시장 등이 연수원 동기다.

부산에서 문 후보는 사법시험 동기인 박정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소개로 노무현 변호사를 만났다. 원래 노 변호사와 함께 일하기로 한 박 전 수석이 검사로 임용되는 바람에 문 후보를 대신 소개한 것이다. 문 후보는 노 변호사의 첫 인상에 대해 "나와 같은 과에 속한 사람이라는 동질감이 강하게 느껴졌다"고 회고했다. 두 사람은 '노무현 문재인 합동법률사무소'를 차리고 부산ㆍ경남지역의 인권, 노동 등 각종 시국사건의 변론을 도맡았다.

부산ㆍ경남 민변을 창립했고 87년 6월에는 부산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를 결성했다. 당시 부산 국본 상임집행위원장은 노무현, 상임집행위원은 문재인이었다.

88년 노 변호사는 13대 총선을 통해 정계에 진출했지만 문 후보는 부산에 남아 시국, 노동 사건에 대한 변론을 맡아 오다가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민주당 후보의 부산선대본부장을 맡아 당선을 도왔다.

정치인으로서 문재인

문 후보는 참여정부 초대 민정수석을 맡았으나 이듬해 2월 사퇴하고 히말라야 트레킹에 나섰다. 건강 악화에다 열린우리당의 17대 총선 출마 요청을 거절하며 생긴 불편함이 주된 이유였다.

그러나 네팔 현지에서 노 전 대통령 탄핵 소식을 접하고 급거 귀국해 법정 대리인을 자처했다. 탄핵 심판 이후 청와대로 복귀해 시민사회수석을 거쳐 다시 민정수석을 지낸 뒤 참여정부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노 전 대통령과 함께 퇴임했다.

노 전 대통령의 퇴임 이후 문 후보는 양산으로 내려가 법무법인 부산의 대표 변호사로 복귀했다. 하지만 운명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이 2009년 5월 검찰 수사를 받던 중 서거하자 상주 역할을 수행했고 노 전 대통령 추모 사업을 위한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이후 노풍(盧風)이 불면서 친노 진영에서부터 '문재인 대망론'이 제기되기 시작했고, 2011년 6월 자서전 <운명> 출간 이후에는 친노의 대표 주자로 자리매김했다.

그 해 12월 혁신과통합 공동대표로 야권 대통합에 참여하며 민주당 창당에 기여했고 19대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서 당선되면서 민주당의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로 급부상했다.

그는 저서 <운명> 에서 "당신(노 전 대통령)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 못하게 됐다"고 썼다. 자신이 저서에 쓴 말처럼 야당의 대선 후보가 됨으로써 그는 또 다른 운명의 시험대를 마주하게 됐다.

김회경기자 herm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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