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해의 성난 파도 저녁에 들이치고/푸른 산의 슬픈 빛은 가을 기운 띠고 있네/…/서울의 친지는 생사 소식조차 끊어지고/안개 낀 강 위의 외로운 배에 누웠네' 제주에 유배된 광해군이 지은 시에는 권력무상이 절절이 배어있다. 재위기간보다 길었던 19년의 유배생활은 비참했다. 강화에서 태안으로 유배될 때 호송 별장들은 자신들이 윗방에 들고, 광해군은 아랫방에 머물게 했다. 제주에서는 심부름하는 계집종에게도 면박을 받았다. 마지막 가는 길도 쓸쓸했다. 제주목사가 부음을 듣고 도착하자 계집종 혼자 염을 하고 있었다.
■ '광해군 실록'은 조선의 왕 중 유일하게 두 종류가 남아있다. 통상 실록의 초고는 최종본 인쇄 후 세초(洗草:초고를 씻어버린다는 의미)하는 데 실수로 남겨졌다. 남겨진 초고에 '광해군 죽이기'의 단면이 드러난다. "이것이 과연 적과 화친을 하자는 뜻이겠는가"라는 삭제된 구절이 한 예다. 인조반정 주체들의 광해군 폐위 명분 중 하나는 오랑캐인 후금과의 화친이지만 광해군의 이 말은 그 명분이 구실이었음을 보여준다.
■ 광해군 만큼 평가가 극과 극인 왕은 드물다. 오항녕 전주대 교수는 근저 에서 '실용외교' '중립외교' 평가는 일제의 만선(滿鮮)사관 합리화를 위한 역사왜곡이었다고 주장한다. 궁궐 재건 등 무리한 토목공사로 민생을 파탄 내고 경연(經筵)에도 참석하지 않는 무능한 군주였다는 것이다. 중세의 해체를 촉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며 광해군 치세기를 '잃어버린 15년'이었다고 단정한다.
■ 그 대척점에 광해군 다시 보기를 시도한 한명기 명지대 교수의 (2000년)가 있다. 광해군의 왕권강화를 위한 포석이 내치를 헝클어뜨렸지만 그의 외교는 분명 탁월하고 일관성이 있었다고 평가한다. 광해군에 대한 이런 상반된 시각이 대중문화계의 영감을 자극해 '광해, 왕이 된 남자'라는 영화가 만들어졌다. 한중일 영토분쟁 등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 격랑 속에서 광해군은 천착할 만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이충재 논설위원 c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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