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뒀더라. 책꽂이에 꽂힌 채로 색까지 바랜 열음사 판 <윤동주 평전> (1996년 증보 6쇄)을 찾아 나선 건 이정명의 소설 <별을 스치는 바람> 때문이었다. <뿌리 깊은 나무> <바람의 화원> 등 드라마로 만들어진 흥미진진한 역사소설을 써온 이씨의 역량은 이번 작품에서도 유감이 없다. 채 서른이 되기도 전에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의 차디찬 독방에서 외마디 비명과 함께 스러진 윤동주의 마지막 삶을 미스터리 스타일로 박진감 있게 그렸다. 바람의> 뿌리> 별을> 윤동주>
윤동주는 정말 어떤 최후를 맞았던 걸까. 소설을 읽고 그런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윤동주 평전> 이 떠올랐던 거다. 저자는 윤동주의 동갑내기 고종사촌형으로 '같은 해에 같은 집에서 태어나 같은 해에 같은 일제의 감옥에서 같은 죄목으로 나란히 옥사한' 송몽규의 조카다. 장편소설 몇 편을 썼고 역사 연구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와는 문화부 기자로 몇 번 만날 기회가 있었다. 저자에게는 미안한 말씀이지만 내용이 어렴풋하게라도 기억에 없는 걸 보면 '사인'에 해당하는 증정 글귀가 담긴 책을 저자에게서 직접 받고도 건성으로 넘겨보고 말았던 모양이다. 윤동주>
그리 길지 않은 세월인데도 벌써 낡은 책 냄새까지 훌훌 풍기는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겨 가다 그만 이 평전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고 말았다. 저자가 고증에 더할 나위 없이 치밀하다는 것은 여러 저술을 통해 익히 알려져 있다. 이 책에서는 그런 사료 고증은 물론이고 윤동주를 아는 많은 사람을 인터뷰해 시인의 삶을 생생하게 되살려 놓았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이런 대목들이다. '계절이 지나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있읍니다'로 시작하는 그의 시는 왜 '별 세는 밤'이나 '별 헤아리는 밤'이 아니고 '별 헤는 밤'일까. 문제를 푸는 열쇠는 윤동주가 나고 자란 두만강 건너 땅 북간도를 지배했던 함경도 육진(六鎭)문화에 있다. 저자에 따르면 김종서의 개척 이후 육진 주민들은 주변과 별 내왕 없이 폐쇄적으로 살며 세종 당시의 말소리를 한말까지 유지했다. '헤다'는 국어사전에 '세다'의 함북 사투리라고 나오는데, '함경도'가 아니라 굳이 '함북'이라고 한 것은 육진 사투리를 의미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북간도 사람들은 경음화하지 않은 '순하고 은근하고 아름다운' 옛말을 간직하고 있었고 윤동주의 시는 그런 언어문화의 산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국어교과서에 가장 많은 작품이 수록된 이 국민시인의 시가 처음부터 탁월했던 것은 아니다. 평양 숭실학교 시절인 10대 후반의 초기 작품에는 문학청년 취향의 현학적인 정서가 두드러진다. 그런 시풍이 일거에 변하는 것은 1935년 말 '조개껍질'을 시작으로 잇따라 동시를 쓰면서부터다. '이 돌연한 전환, 갑자기 성큼 앞으로 나간 발전'의 비밀은 그 즈음 나온 <정지용 시집> 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고 저자는 본다. 이 시집에는 정지용의 대표작 '향수' 등과 함께 여러 편의 동시가 당당히 실려 있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윤동주의 <정지용 시집> 유품에는 곳곳에 붉은 줄이 그어져 있고 이런 저런 감상이 깨알 같이 적혀 있다. 윤동주가 문학청년 태를 일거에 벗어 던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떠난 뒤 세상에 빛을 본 유일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에 서문을 쓴 정지용의 영향이 컸다. 하늘과> 정지용> 정지용>
<별을 스치는 바람> 의 주요 모티프인 그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에 대해서도 평전은 소상히 다뤘다. 그가 죽기 직전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맞았다는 것을 여러 증언을 통해 밝히면서 아시아태평양 전쟁 말기 전장에서 필요한 혈장을 대체하는 생리식염수 인체 실험의 피해자였을 수 있다는 일본 학자의 추정을 소개했다. 같이 옥중에서 주사를 맞다가 윤동주가 절명하고 채 한 달이 안 돼 숨을 거둔 송몽규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했다고 한다. 시신을 거두러 간 그의 부친이 "내가 왔다"며 눈 감기고 화장하기 전날 밤 송몽규는 아버지 꿈에 나타난다. 윤동주의 동생 혜원씨의 증언이다. "몽규 오빠가 꿈에서 '내 뼛가루 한 점이라도 이 원수의 땅에 남기지 말아달라'고 했대요." 윤동주의 유해는 화장해 재를 현해탄 바다에 날리고 뼛가루를 담은 작은 나무 상자로 돌아왔지만, 송몽규의 아버지는 재는 물론이고 "타다 남은 뼈를 절구질할 때 튄 것까지 모조리 쓸어 모아서 갖고" 왔다. 별을>
<별을 스치는 바람> 은 지금까지 8만부 정도가 나가 올해 국내에서 출간된 소설 중 가장 많이 팔렸다고 한다. 그 소설을 읽었던 사람은 꼭 이 평전을 찾아 읽기를 권한다. 소설보다 훨씬 흥미진진할 뿐 아니라 감동적이다. 이 책은 과거 <외국문학> 이라는 훌륭한 계간지를 냈던 열음사에서 처음 나왔다가 1990년대 후반 세계사에서, 2000년대 중반 푸른역사에서 재출간돼 지금은 푸른역사 판으로 구할 수 있다. 외국문학> 별을>
[다시 읽고 싶은 책]지난주 선정도서 <혼불> 당첨자 10분입니다. @uniggalove @gangmin84 @Herabling @chlgpdus921 @swjsl6 @modelomg @iamsherlocked11 @dk08050 @mr_1005 @freestyle0527 축하드립니다. 혼불>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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