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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손님' 손님 돈 뜯어 먹는 '황당한 환대'… 누가 진짜 눈뜬장님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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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손님' 손님 돈 뜯어 먹는 '황당한 환대'… 누가 진짜 눈뜬장님이었을까

입력
2012.09.14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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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민음사 발행ㆍ236쪽ㆍ1만1,500원

다섯 편의 '경마장' 시리즈를 통해 90년대 문학계 파란을 일으킨 하일지는 튀는 이야기만큼이나 독특한 작법으로도 정평이 나있다. 작가는 소설을 쓸 때 사전 구상을 거의 하지 않고 마음에 드는 첫 문장이 떠오르면 쓰고, 써놓은 문장에 맞춰 즉흥적으로 다음 문장을 쓴다. 홍상수 감독이 그날그날 쪽대본으로 영화를 찍는 것처럼. 인물들의 비논리적인 행동을 과장된 설정으로 우스꽝스럽게 묘사하는 것도 홍상수 영화와 닮았다. 신작은 이런 하일지표 특징이 농축돼있다. 우선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해거름 녘에 모자를 쓴 남자 하나가 마을로 들어서고 있었다. 허표의 동생 허도는 고욤나무 밑에 웅크리고 앉아, 대체 저 모자 쓴 사람이 오늘 밤 어느 집에서 잘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저 모자 쓴 사람은 다섯 살에 입양됐다가 40여년만에 한국을 찾은 '미스터 슈'라는 47세 남자다. 슈는 허도의 누나 허순이 가르치는 고등학교 무용단의 서울공연을 보고, 허순을 찾아 하원마을까지 내려온다. 허순과 허순의 애인 석태는 반갑게 슈를 맞이한다. 손님은 발렌타인 30년을 선물로 내놓고, 무용반 학생들도 불러 기분 좋게 술을 마신다.

한데 허순의 '환대'가 좀 특이하다.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허순은 개고기를 먹으러 가자고 제안하며 허도는 물론 허표 내외까지 부른다. 통역을 맡은 여학생 채령은 손님에게 개고기를 양고기라 속이고, 손님은 개고기를 맛있게 먹는다. 계산할 때가 되자, 허순은 계산서를 손님에게 내민다. 손님은 "댓츠 오케이"를 외치며 흔쾌히 계산하고, 2차로 석촌호로 자리를 옮겨 술 마시고 노래를 부른다. 물론 이 술값과 석촌호로 가는 봉고차 대여비도 손님의 몫이다. 여학생들은 손님의 관심을 끌기 위해 쟁탈전을 벌인다. 거나하게 취한 손님이 갑자기 옷을 벗어 던지며 석촌호로 뛰어들며 저편의 조그마한 바위섬을 향해 헤엄치기 시작하자 요염한 여학생 유나는 속옷 바람으로 손님을 따라 헤엄친다.

두 사람이 다시 석촌호로 돌아오자, 허순 일행은 손님의 스위트룸으로 자리를 옮겨 다시 민폐를 끼친다. 손님은 "한국 사람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나라의 사람이 다 똑같다"고 말하며 '하원마을 환대'를 받아넘긴다.

작별의 순간, 손님은 허도에게 100만원을 쥐여 주며 "개고기 사 먹어"라고 한국어로 말하지만 허도는 너무 놀라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허순은 손님에게 왜 동생 허도만 돈을 주냐며 화를 내며 따진다. 손님은 허순에게도 돈을 주며 "당신은 내 어머니를 닮았어요"라고 한국어로 말하지만 허순 또한 너무나 기쁜 나머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손님이 떠난 후 유나는 "손님과 함께 섬에서 달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손님이 '양고기 맛있었어'라고 정확한 한국어로 말했고, 그 후로도 오랫동안 많은 대화를 한국어로 나눴다"고 말한다. 손님은 과연 누구였을까.

'슈'의 비밀이 드러나는 찰나, 이야기는 허망하게 끝나버린다. 비밀을 가득 품은 영화 주인공이 숨을 한껏 들이마시고 고백하려는 찰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느낌과 비슷하다. 이런 황당한 결말이, 다양한 상상을 가능케 하는 '열린 결말'이란 점에 동의하지만, 일간에서 말하는 인간 심리 기저의 환멸이나 비열함을 암시하는 장치 같진 않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며 의미를 찾으려는 독자보다, 허무개그를 즐기는 독자에게 추천하는 소설이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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