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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섹슈얼 트라우마' 性的 트라우마는 암·에이즈보다 흔한 질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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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섹슈얼 트라우마' 性的 트라우마는 암·에이즈보다 흔한 질병이다

입력
2012.09.14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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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슈얼 트라우마 / 정국 지음ㆍ블루닷 발행ㆍ632쪽ㆍ2만8000원

"나는 살아 있는 거짓덩어리입니다. 당신이 보고 있는 그 어떤 것도 내 진짜 모습이 아니에요. 내 진짜 모습은 내게 계속 약을 먹으라고 권하는 간호사의 목을 부러뜨리고 싶고, 어떤 이유나 양심의 가책도 없이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고, 아내를 사랑하고 돌보는 척하면서 사실은 그녀를 칼로 찌르는 상상을 하는 그런 사람입니다."(30쪽)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정신적ㆍ육체적 학대를 받은 한 성인 남성의 고백이다. 어른이 되고 결혼을 한 이후에도 트라우마(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고 있는 그는 피학적 성향에서 비롯한 환상 증세까지 보이고 있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정신과 개업의로 30년 이상 수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을 상담해 온 정국 박사가 쓴 이 책은 성폭력과 트라우마에 관한 종합 보고서다. 성폭력 사례부터 이후 발현되는 트라우마의 수천 가지 모습, 회복을 위한 치료와 실제적인 조언까지를 포괄한다.

아동 성폭력으로 온 나라가 분노하면서 성 범죄자들에 대한 화학적 거세 등 처벌 강화 논의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평생 피해자를 따라다니는 트라우마의 문제는 여전히 수면 아래에 있다. 저자는 세상과 피해자 자신으로부터 쉬쉬하도록 강요되어 온 불편한 진실을 이제라도 공론화하자고 말한다. 성적 트라우마는 암이나 에이즈보다도 더 흔한 질병이며, 전 인류의 무려 3분의 1 이상이 직간접적으로 앓고 있다는 것이다. 성적 욕구는 가장 원초적이고 기본적인 단계의 정신에서 발달해서 무의식 깊숙이 자리잡기 때문에 우리 의식 전체를 파고든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공황 장애, 우울증, 혼란, 환영, 자살 충동, 편집증, 약물과 알콜 중독, 자해를 비롯한 자기 파괴적 행동으로 발현되는데 문제는 점점 심각해진다.

세계 지도자나 작가, 배우, 가수의 구체적 성적 학대 사례는 놀라울 정도로 많다. 대영제국의 기틀을 마련한 여왕 엘리자베스 1세가 의회의 청원에도 불구하고 '처녀 여왕'으로 남은 데는 열네 살 때부터 수년간 의붓아버지 토머스 경에게 당한 성추행이 큰 영향을 끼쳤다. 토머스 경은 하인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엘리자베스를 품에 안고 희롱했다. 심지어 엘리자베스가 문을 잠가버릴 때를 대비해 모든 방의 열쇠를 가지고 다녔다. 나폴레옹 황제는 동성애적 행동으로 악명 높던 브리엔의 군사학교를 다녔는데, 후에 "수도사 사이에서 자라면서 수도원의 악행과 타락을 경험했다"고 말하는 등 상급생과 수도사들로부터 성적으로 괴롭힘을 당했다고 암시했다.

책의 특이점은 유명인사들 가운데 그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 희생 '때문에' 달라진 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여덟 살 때 하숙집 주인에게 성폭행을 당한 마릴린 먼로가 어른스러운 성적 매력과 어린아이 같은 천진함을 지닌 최고 배우가 된 것이나 아홉 살 때 친척과 친구로부터 성추행을 당하고 열네 살 때엔 성폭행을 당한 후 아이까지 낳았다고 고백한 오프라 윈프리가 대중을 포용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등 긍정적인 면을 고찰하는 식이다. 트라우마를 이겨낸 개인의 인간 드라마를 면밀히 서술하는 방식은 성폭력 피해자들이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정신과 상담을 받는 효과를 보여준다. 성폭력 희생자들이 인생의 한 토막을 아예 기억하지 못하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는 지적 등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들에 대해 일반인들의 이해를 돕는다.

저자는 성폭력이 불가피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인간사의 일면이라면서 희생자의 트라우마가 주변으로부터 얼마나 체계적인 도움을 받았느냐에 달린 만큼 힘껏 돕자고 말한다.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자해나 자살 충동 등 자기파괴행위는 물론, 설명할 수 없는 이미지나 소리, 냄새, 통증, 촉감이 온몸을 덮치는 '회상 환상'은 성적 트라우마 환자들이 겪는 일상적 경험이다. 결혼 생활 역시 파국을 맞는 경우가 흔하다.

섹슈얼 트라우마는 뿌리가 아주 깊은 인간사의 문제이며 치유에 앞서 극복의 대상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책 말미에 부모와 의사들을 위한 매뉴얼과 조언도 첨부했다. 성폭력이 외부인이 아닌 가족, 친지, 이웃, 친구라는 사실이나, 미국 한 통계에 의하면 여성의 27%, 남성의 16%가 근친상간을 당한다는 점 등이 충격적이다. 친척 성직자에게 성폭력을 당한 한 피해자의 호소는 여타 충격과 달리 한 인간의 삶 전체를 흔들만한 심각한 파괴행위이며, 정신적 외상을 치유하는 게 사회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일깨운다. "죗값을 치러야 하지 않나요? 그런데 그 사람은 이미 죽고 없어요. 그래도 누군가는 대가를 치러야 해요. 누가 될지는 모르지만요. 아마 모든 사람이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몰라요. (…)나만이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건 인정할 수 없어요."(354쪽)

고(故)다이애나비나 안젤리나 졸리 등 유명인사들이 여러 차례 이상행동을 보인 정황상 성적 피해가 의심된다고 추정하는 등 다소 억지스러운 부분이 섞여 있는 것은 거슬리지만 성적 트라우마에 대한 종합 보고서로서 손색이 없는 책이다. 특히 피해를 돌이킬 수 없다면 받아들이고 더 이상 희생자에만 머물지 말라는 메시지나 섹슈얼 트라우마를 창조적 에너지로 승화할 수 있다는 구체적 주장은 그동안 간과됐던 부분이라 의미가 크다.

채지은기자 c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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