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도, 남자도 관심 밖. 오로지 그룹 HOT가 그녀의 인생에서는 중요할 뿐이다. HOT의 공연이 있다면 만사 제쳐놓고 어디라도 따라다니는 딸에게 아버지(성동일)는 "딸아 딸아 개딸아. 한심한 가시내, 니가 내 딸년이냐"고 호통을 친다. 마지막 한 회를 남겨놓은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7'에서 부산의 HOT 빠순이 고교생 성시원의 성장기를 연기한 정은지(19)를 13일 만났다. 정은지는 걸그룹 에이핑크 멤버이기도 하다.
'응답하라 1997'은 정은지의 첫 드라마다. 당연히 떨리고 실수도 많았을 터. 그는 "첫 촬영 때 공중전화를 걸어야 하는데 손이 너무 떨려 수화기를 들기도 힘들었을 정도"라고 했다. "그래도 다행인 게, 저와 극중 성시원의 성격이 80% 이상 닮은 거예요. 그냥 선머슴 같은 제 모습을 보여주자는 생각으로 연기했죠."
별명이 '상남자'라며 털털한 성격을 수 차례 강조했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천생 여자다. 그렇다고 다소곳한 건 절대 아니다. 가슴이 아려도 꾹 참고 직설적으로 내뱉는 게 그의 화법이다. "극중에서'형이 너를 사랑하니 내 짝사랑은 이제 그만'이라며 남자가 6년간 자취를 감춘 거예요. 시원이가 얼마나 보고 싶고, 아팠겠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다시 만났는데 '여자친구 있다'고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그에게 '지랄하네' 한 마디 던진 대사, 10년 묵은 체증이 풀리듯 속이 후련했어요."
초보 치고는 연기가 상당히 자연스럽다는 평가에 정은지는 "어떻게 해야 연기에 힘이 들어가는지도 모르니 그런 거죠"라며 쑥스럽게 웃었다. 연기라고는 아무 것도 모르고 대사 끊어 읽는 정도만 익히고 촬영을 시작했단다. 평생을 부산에서 자랐으니 극중에서 속사포로 쏟아내는 원단 부산 사투리는 당연할 수밖에 없다.
이 드라마의 배경은 1997년. 당시 정은지는 네 살이었다. 설정부터가 낯설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아날로그와 친숙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랐다"며 "그것도 행운"이라고 말했다. "집이 경제적으로 넉넉한 편이 아니었어요. 필요한 게 있다고 딱딱 살 수 없으니 그저 오래 써야 했죠. 가구나 시계 모두 오래된 물건이었고, 친구들이 CD플레이어나 MP3 들고 다닐 때 전 카세트 테이프로 음악을 들었어요."
정은지는 좋아하는 노래를 마음껏 부를 수 있고, 연기로 인기를 얻고 있는 지금이 꿈만 같다고 했다. 아주 어릴 적부터 '노래 부르는 사람'이 꿈이었지만 고된 노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너무나 갑자기, 짧은 시간에 연예인이 됐기 때문에 더 꿈 같을 법도 했다.
좋아서 혼자 연습한 것 빼고 노래를 정식으로 배운 건 고등학교 때 반 년 남짓. 당시 다니던 학원 부원장 소개로 본 오디션에 덜컥 붙었다. 합격하고 나니 오히려 겁이 났다. "못 하겠다"고 하자 그 때까지 가수 되는 것을 뜯어 말리던 어머니의 태도가 돌변했다. "이런 기회가 다시 오겠냐"며 딸 손을 잡고 서울로 올라왔고, 힘이 들어 투정을 부리면 "그런 정신력으로 성공할 수 있겠느냐. 당장 부산으로 내려오라"고 호통을 친단다. "엄마는 저한테 그래 놓고 앓아 누워요. 그래도 호통을 들으면 정신이 바짝 들죠. 예쁘게 봐 주시는 팬들이 있으니 호통 들을 일 없이 더 열심히 할게요."
허정헌기자 xscope@hk.co.kr
전수현 인턴기자 (이화여대 정치외교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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