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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숙 칼럼] 세습을 반기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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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숙 칼럼] 세습을 반기는 사회

입력
2012.09.13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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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중반에 버스요금은 900원, 김치찌개 한 그릇은 5,000원 정도로 지금과 큰 차이 없었다. 1만원이면 어른이 하루를 보내기 빠듯했다. 당시 1만원으로 1주일을 살 수 있는가를 체험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었다. 2003년에 시작된 이 프로그램에 등장한 이들이 버스 타는 것도 벌벌 떨면서 과업에 성공하는 과정은 절약이 일상인 평범한 이들에게 적잖은 위로와 재미가 됐다. 그런데 2006년 중반부터 이 프로그램의 주인공은 일반인에서 연예인으로 바뀌었다. 연예인이라고 공짜 음식도 얻어먹는 것은 일반인의 공감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화려한 스타들이 지지리 궁상을 떠는 모습은 색다른 재미였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이 시기를 고비로 연예인들의 일상이 텔레비전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수다, 그들의 놀이로 예능프로그램이 바뀌어가더니 이들만의 체험, 이들만의 여행으로 채워지고 언제부터인가는 연예인의 아들 딸과 아내 남편까지 등장했다. 이제는 방송에서 연예인이 나오지 않는 예능프로그램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방송 뿐인가. 인터넷에는 연예인의 일상이 늘 최고의 화제가 된다. 연예인의 아들 딸 형제가 얼마나 잘 컸네 예쁘네 하며 사진이 공개되더니 누구 아버지 어머니는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로 번져간다. 이런 화제를 타고 연예인 가족이 다시 연예인으로 안착을 한다.

방송 프로그램은 적게는 수십만원 많게는 수백만원의 출연료를 한번에 받는 자리이다. 그런데 연예인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쉽게 그 자리에 들어가서 스타 대열에 합류하는 것은 바람직한가. 온갖 재능과 화제거리를 준비하고 대중 앞에 서고 싶은 이들이 줄을 서 있는 세상에서 이건 새치기다. 그런데도 대중의 관심을 끈다는 이유로 이런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난다.

연예인 세습이 최근 현상이라면 대기업의 세습은 매우 오래되었다. 그런데 이 곳에도 요 몇 년 새 새로운 현상이 있다. 과거의 재벌상속이 어쩔 수 없이 묵인하게 되는 그들만의 잔치였다면 요즘은 그들이 연예인처럼 호감과 선망 어린 대상이 됐다. 재벌 자녀가 임원으로 무임승차해서 벌여놓은 일은 회사 차원의 업적이든 재벌의 일감 몰아주기 사례든 '실력을 보여줬다'고 부각이 되고 단지 부잣집 딸이 비싼 옷으로 차려 입은 입성은 '뛰어난 패션감각'이라고 칭찬해마지 않는다. 이런 기사가 가십전문 잡지가 아니라 권위지를 표방하는 일간지에도 아무렇지 않게 실린다.

정치판에는 박정희의 유산을 세습하려는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있다. 5.16 군사반란이나 유신독재에 대해서 상식적인 판단을 거부하는 그는 최근에 박정희 집권 시절 가장 끔찍한 사법살인 중 하나인 인혁당 사건을 두고 '두 개의 재판결과가 있다'고 말했다. 유신독재 때 정치재판을 인정한다는 말은 일제 때 독립운동가를 처형한 재판도 인정한다는 말이 된다. 그 자체로 공직에서 물러나야 마땅할 망언이다. 그런데 그가 물러나기는커녕 박정희를 옹호하는 이들이 그를 둘러싸고 더 심한 망언을 외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아버지 박정희의 잘못을 딸에게 덮씌우지 말라고 한다. 그들의 소원대로 세습을 걷어낸 박근혜 후보는 국회의원으로 입법한 것은 없고 당대표였을 때는 사학법 개정과 국가보안법 폐기에 극렬하게 반대해서 사학비리를 옹호하고 언론자유를 위축시켰다. 현재 새누리당의 최고 실세이면서 민간인사찰이나 사대강 의혹을 해결하는 데에 전혀 나서지 않고 있다. 가족들의 저축은행 관련 여부도 덮고만 있다. 박정희 딸을 걷어내면 망언을 일삼는 이들을 거느린, 상식 없는 공인일 뿐이다. 그런데도 그가 여론조사로는 대통령 후보 1순위이다.

재능을 가진 개인이 아무리 노동해도 왕과 귀족의 세습 지위를 따라가지 못해서 굶주리는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인류는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을 흘렸나. 그런 시기를 2012년 대한민국에서 다시 보고 싶지 않다면 일상에서 벌어지는 세습을 지금보다는 더 단호하게 끊어야 한다. 더구나 박근혜가 이으려는 세습은 독재의 유산이다.

서화숙 선임기자 hss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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