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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삶이 있는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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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삶이 있는 저녁

입력
2012.09.12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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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학규 민주통합당 대선 경선 후보의 선거 슬로건인 ‘저녁이 있는 삶’이 그의 지지도와는 별개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지금까지 선거 슬로건들은 주로 선진, 성장, 풍요 등 지겹도록 들어온 단어들을 포함해 왔다. 그것들은 국가나 민족이라는 전체 집단이 나아갈 바를 구호처럼 제시했다. 하지만 ‘저녁이 있는 삶’에는 지극히 평범한 단어 둘이 들어 있다. 바로 ‘저녁’과 ‘삶’이다. 집단이 아니라 개인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익숙한 풍경과 환경이 저녁과 삶이다. 그 두 단어를 조합하니 시적인 말이 탄생한다. 저녁이 있는 삶은 우리로부터 얼마나 멀어졌는가, 그것을 우리가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는가를 손 후보의 슬로건은 애틋하게 표현한다.

‘저녁이 있는 삶’의 주요 내용은 ‘노동시간 단축’이다. 이를테면 ‘정시 퇴근제 도입’, ‘장시간 노동의 개선’, ‘휴가 확대’ 등이 손 후보의 첫 번째 정책 목표다. 확실히 그의 슬로건은 직업을 가진 중산층을 대상으로 한다. 과로에 시달리는 중산층, 개인만의 고즈넉한 시간, 가족과 친구들과 보내는 화목한 시간을 과로에 빼앗긴 중산층에게 그의 슬로건은 어필한다. 그는 노동시간의 단축이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은 물론 경제적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정규직 일자리를 창출하고 나누는데 도움을 줄 거라고 본다. 그렇게 그는 한국사회에서 중산층의 두께를 두텁게 하고, 그들에게 안정과 행복을 되돌려주겠다고 약속한다.

다소 문학적인 표현법에 중산층, 혹은 중산층에 소속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 어필하는 ‘저녁이 있는 삶’이란 슬로건을 곱씹어 보다가 그것을 살짝 바꿔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삶이 있는 저녁’이다. ‘삶이 있는 저녁’과 ‘저녁이 있는 삶’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 차이는 이런 질문들로 나타난다. 만약에 노동시간 단축이 이루어져 저녁이라는 시간이 우리에게 충분히 주어지면 어떻게 될까. 그때 우리는 무엇을 할까.

나는 최근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일하고 남는 시간에는 주로 무엇을 하세요?”라고 묻는다. 대부분은 아무 것도 안 한다고 답한다. 어떤 분은 낮에 너무 생각을 많이 해서 저녁 이후에는 아무 생각도 안 하는 게 최고라고 했다. 그나마 여가 활동이 있다면 TV 시청과 외식, 음주가 가장 많았다. 그 외에 학원, 운동, 영화관람 등이 있었다. 간혹 몇몇 사람들은 흥미로운 대답을 했다. 친구와 ‘독립잡지’를 만든다거나, ‘축구심판’이 될 준비를 한다거나. 하지만 그런 식으로 뭔가에 미친 듯이 몰입하고,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삶을 가꾸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들에게는 저녁이라는 시간이 주어져도 정작 그 시간에 채워 넣을 삶이 없거나 부족한 것이 아닐까?

‘저녁이 있는 삶’은 ‘과로’라는 노동의 양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과도한 노동양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노동의 질이다.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주체적 역량을 발휘할 수 없는 노동 조건, 실업의 불안에 덧붙여 주체성 자체를 잃는 존재의 불안이 확산되고 있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경우는 더 하다. 이들은 임금뿐만 아니라 조직 내의 의사결정, 구성원 간의 소통, 인간적인 대우에서 불평등과 배제를 겪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삶이 있는 저녁’이 절실하다. ‘삶이 없는 낮’ 동안에 빼앗긴 인간성과 자존감을 저녁에 어떻게든 회복해야 한다.

‘삶이 있는 저녁’은 ‘저녁이 있는 삶’처럼 정책 슬로건이 될 수 없다. 그 시간은 기업이나 정부가 우리에게 ‘배려’해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삶이 있는 저녁’은 차라리 ‘인간 선언’에 가깝다. 그 선언의 내용은 이렇다. 우리는 노동하는 동물이 아니다. 우리는 저녁에 다음 날의 노동을 준비하며 내용 없는 휴식의 시간을 보내지 않겠다. 우리는 저녁에 우리가 인간임을 입증하는 활동적 삶을 주체적으로 발명하겠다. 그 삶은 저녁에서 새벽으로 아침에서 낮으로 조금씩 확장될 것이다.

심보선 시인·경희사이버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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