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의 경제민주화 논쟁을 지켜보는 재계의 불안감은 이해가 가지만, 여당 원내대표라는 사람의 신경질적인 반응은 백 번을 양보해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정체 불명의 경제민주화 탓에 기업 의욕이 떨어지고 국민이 불안해하고 있다는데, 그 국민이 누구인지 묻고 싶다. 누가 뭐라 떠들어대든, 올해 대선의 최대 이슈는 경제민주화다.
국민 대다수가 경제민주화에 공감하는 건 수출 대기업 위주의 성장이 한계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대기업의 배는 갈수록 불러가는데, 중소기업과 자영업자, 임금 근로자를 비롯한 국민 대다수의 삶은 어려워지고 있다. 단 두 개 재벌의 영업이익이 전체 상장사의 절반을 점할 정도로 양극화는 심해지고 있다. 재벌 하나가 망하면 대한민국 경제가 흔들릴 수밖에 없는 그지없이 취약한 구조다.
대기업이 성장한 만큼 일자리가 늘어난 것도 아니다. 최근 10년간 30대 그룹의 임직원 증가율은 자산 및 매출 증가율의 3분의 1 수준에 머물렀다. 대기업들이 돈을 벌어들인 만큼 고용을 늘리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른바 고용 없는 성장이다. 지금처럼 양극화를 확대하는 성장, 고용 없는 성장으로는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유지하는 게 불가능하다.
더구나 세계 경제는 이제 저성장 시대로 접어들었다. 양대 선진국인 미국과 유럽의 저성장이 10여 년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수출 위주의 성장을 지속하기도 쉽지 않다. 절대 다수의 국민들이 경제민주화에 공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경제민주화란 수출 대기업을 홀대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용자와 노동자, 기업과 소비자 간의 불균형을 시정함으로써 지속 가능한 성장 모델을 만들어내자는 것이다.
한 마디로 수출과 내수의 균형 성장을 이루자는 얘기인데, 최근 내수를 키우려는 중국의 움직임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중국은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수출전선에 비상등이 켜지자 안정적인 고속 성장을 위해 내수 활성화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정책이 근로자 임금 인상이다. 12차 5개년 경제개발계획(2011~15년) 기간 동안 근로자 임금을 두 배로 인상한다는 목표 아래 매년 15% 안팎씩 임금을 올리고 있다.
유엔도 신자유주의 성장 패러다임의 대안으로 임금 주도형 성장 전략을 제시했다. 생산성 증가에 상응하는 만큼 실질임금을 인상해 노동소득 분배율을 개선하고 부진한 민간 소비를 회복함으로써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룰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우리나라의 임금 정책은 글로벌 트렌드와 거꾸로 가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전체 취업자 수는 약 2,500만 명. 이 중 70%가 월급으로 살아가는 임금 근로자다. 하지만 MB 정부 들어 임금 인상률은 극히 미미했고, 최근 2년 간은 실질임금이 오히려 줄었다. 더욱이 임금 근로자의 3분의 1은 비정규직이며, 이들의 임금은 월평균 150만원에도 못 미친다. 저임금 근로자 비중이 OECD 회원국 중 가장 높고 노동자 간 임금 격차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러니 가계부채 증가와 내수 부진의 악순환이 반복되는 게 당연하다.
재계는 국내 고임금 구조 탓에 해외 생산기지를 늘릴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제조업의 매출액 대비 인건비 비중은 1992년 14% 수준에서 작년엔 8%대로 하락했다. 국내 고용 기반이 무너지면 사회적 갈등이 커져 재계에도 큰 부담이 된다. 당장의 임금 인상이 어렵다면, 임금 구조조정을 시도해볼 만 하다. 임원과 평사원 간 과도한 임금 격차만 줄여도 중ㆍ하위층 임금 근로자의 소득을 크게 끌어올리고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
임금 근로자, 특히 저소득 근로자는 소비성향이 높다. 반면 자산소득자와 고액 연봉자는 저축성향이 높으며, 소비를 하더라도 해외로 나가거나 수입산 사치품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 소비성향이 높은 저소득 근로자의 임금을 높이면 부진한 민간 소비가 회복되고 내수 경기가 살아날 수 있다는 말이다. 자산소득에 대해 세금을 많이 물리고 고액 연봉자의 임금을 줄이면 해외로 빠져나가는 수요를 국내로 돌리는 장점도 있다. 갈수록 고용이 위축되는 저성장 시대의 대안으로 임금 주도형 성장모델을 적극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고재학 경제부장 goindol@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