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혁당 사건은 유신체제에서 일어난 대표적 시국 사건으로 일부에선 조봉암 간첩 사건과 더불어 헌정 사상 유례 없는 ‘사법살인’ 사건으로 꼽는다.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도 불리는 이 사건은 서울대 시위를 계기로 반(反)유신 운동이 확산되던 1974년 발생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 체제하의 유신 정권은 73년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 명의의 유인물이 배포되는 등 유신반대 움직임이 거세지자 이듬해 4월 긴급조치4호 선포를 통해 민청학련 등 사실상 반정부로 평가되는 조직들의 모든 활동을 일절 금지시켰다.
이에 민청학련을 수사하던 중앙정보부는 이 단체의 배후 세력으로 인혁당재건위를 지목, 북한의 지령을 받은 지하조직으로 규정했다. 이들이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 때 궤멸된 인민혁명당을 재건하려 한다는 혐의였다.
중앙정보부는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이 중 23명을 구속 기소했다. 대법원도 75년 4월9일 도예종 등 8명에 대해 사형, 15명에게는 무기징역 및 징역15년형을 선고했다. 사형이 선고된 8명은 대법원 상고가 기각된 지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됐다.
하지만 98년4월 천주교 인권위원회를 중심으로 이 사건에 대한 진실 규명 움직임이 본격화됐다. 2002년9월 의문사진상규명위도 중앙정보부 수사가 조작됐다며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했고 유족들도 그 해 12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해 결국 2005년 법원은 인혁당 사건에 대한 재심을 받아들였고 2007년1월 서울중앙지법은 형이 집행된 8명에 무죄를 선고했다. 국제사회도 이들의 사형이 집행된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이어진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법원은 시국사건 사상 최대액인 637억여원을 국가가 지급하라고 판결하기도 했다.
장재용기자 jy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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