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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류 김기덕 '통쾌한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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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류 김기덕 '통쾌한 반란'

입력
2012.09.09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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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한 아웃사이더의 통쾌한 승리이자 참신한 복수였다. 단 한번도 주류에 끼려 하지 않았고 주류도 끼워주지 않았던 이단아.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왠지 무겁고 이해하기 힘든 작품으로 늘 (한국)대중으로부터도 멀리 있던 그가 보기 좋게 세계무대를 평정하고 금의환향 한다.

'피에타'로 제69회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김기덕(52) 감독. 그의 삶은 자신의 영화만큼이나 굴곡져 있다. 김 감독은 어린 시절부터 평범한 길을 걷지 않았다. 친구들이 학교에 갈 때 그는 여공들과 함께 공장에서 돈을 벌었다. 공식학력은 초등학교 졸업. 그는 후에 자신을 "어릴 적엔 제가 불량품" "열등감을 먹고 자란 괴물"이라고 표현했다. 해병대 하사관을 지원한 것도 열등감을 극복하려는 의도였다. 서른 넘어 떠난 프랑스 미술 유학은 고통에 찬 방랑이었다. 거리의 화가로 생계를 이어가며 그는 영화의 꿈을 키웠다.

1996년 '악어'로 대중의 관심을 받을 만한 영화감독이 되었음에도 그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다. 그의 영화들은 매번 적은 제작비로 만들어졌고, 떠들썩한 흥행을 기록하지 못했다. 2000년대 중반 세계적인 감독의 반열에 올라 유럽에선 '한국영화=김기덕'이라는 평을 받았음에도 그는 국내 극장가에서 여전히 찬밥이었다.

2004년 한 해에만 '사마리아'로 베를린국제영화제 감독상을, '빈집'으로 베니스국제영화제 감독상을 각각 수상하는 진기록을 세웠으나 대기업 계열의 대형 투자배급사들도 그에게 손 내밀길 주저했다. 2008년 그가 제작한 '영화는 영화다'가 흥행에 크게 성공하나 영화 배급사가 파산하면서 수익금을 제대로 분배 받지 못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특히 이 영화를 연출했던 제자 장훈 감독이 자신과 만들기로 했던 영화를 다른 영화사와 만들기로 한 뒤 그는 강원도에서 은둔생활을 했다. 3년간의 칩거를 끝내고 만든 영화가 '아리랑'이며 그는 이 작품으로 2011년 칸국제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부문 대상을 받았다.

태생적 비주류인 김 감독을 세계적 주류로 만든 건 파격이었다. 그는 기존 한국영화에선 다루길 꺼리던 소재들과 과감한 묘사로 자신만의 길을 열어갔다. 한강에 투신 자살한 사람들의 시체를 찾아주는 일을 호구지책으로 삼는 남자('악어'), 하염없이 지방을 떠도는 윤락녀('파란 대문'), 군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차츰 미쳐가는 병사('해안선'), 반항기 가득한 혼혈 청년('수취인불명') 등이 주인공이 됐다. 김 감독의 '섬'을 제작했던 심재명 명필름 대표는 "오롯이 혼자만의 힘으로 편견과 관성을 깨뜨려 가면서 자기만의 영화 언어를 창조한 굉장히 특별한 존재"라고 평가했다.

파격으로 일관한 영화 내용들만큼 김 감독은 스크린 밖에서도 관습과 상식을 거부했다. 2005년 "관객과 직접 만나겠다"며 배급사를 통한 극장 개봉이라는 관례를 깨고 '활'을 공개했으나 흥행에서 참패했다. 2006년 '시간'을 개봉할 때 김 감독은 "한국에 '수출'하는 마지막 영화"라고 말해 파장을 일으켰고, 비슷한 시기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 1,000만 관객에 이르자 '한국영화의 수준'이라고 언급해 논란을 불렀다.

하지만 냉랭한 시선과 두꺼운 기존의 벽을 뚫고 한국영화 100년사에 길이 남는 금자탑을 쌓은 그에게 이젠 한국 영화계와 관객들이 화답할 때이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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