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중앙은행(ECB)의 '무제한(unlimited size) 국채 매입 결정'에 시장은 일단 환호했지만 갈 길은 아직도 멀다. 게임의 규칙에 달린 복잡한 단서들, 고집쟁이 전주(錢主)의 반발, 시간 때우는 사고뭉치들이 뒤엉켜 자칫 판이 깨질 수도 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ECB의 통 큰 결정을 '막대한 판돈이 걸린 도박'에 빗대고 있다.
물론 이번 결정이 단기 호재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6일(현지시간) ECB 발표 직후 위기의 진원인 스페인과 이탈리아 증시가 4% 이상 급등하는 등 유럽 증시가 일제히 상승했고, 간밤 뉴욕과 7일 우리나라(코스피지수 2.57%)를 비롯한 아시아 주요 증시도 올랐다. 국가 부도(디폴트) 위험의 가늠자였던 스페인과 이탈리아 국채 금리 역시 떨어졌다.
그러나 ECB 국채 매입의 세부 시행방식을 들여다보면 효과를 반감시키는 전제조건들이 여럿 붙어있다. 우선 해당 국가의 긴축방안이 담긴 선(先)지원 요청이 필요한데, 주권이 일부 제한되는 조치를 당사국들이 흔쾌히 받아들일지 미지수다.
스페인의 경우 은행 지원은 요청했으나 여전히 직접적인 구제까지는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최근 세를 얻고 있는 이탈리아 민주당 역시 "ECB 구제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못박았고, 심지어 '자멸'이라는 표현까지 썼다. 이들이 설령 이번 결정을 받아들인다 해도 늘 그랬듯 협상 과정에서 진통을 겪으면 시장이 요동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번 조치는 국채를 사들이기 위해 유동성을 푼 만큼 시장에서 돈을 거둬들이는 불태화(不胎化ㆍsterilization)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인플레이션 우려는 그만큼 완화되겠지만 경기부양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워, 위기에 빠진 유럽을 구할 근본적인 해법이 되기엔 역부족이라는 얘기다. 유럽개혁연구소의 사이먼 틸포드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재정위기에 처한 국가에 대대적인 긴축을 요구하면 미약한 성장세마저 짓밟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옌스 바이트만 독일 연방은행(분데스방크) 총재의 꺾이지 않는 고집도 걸림돌이다.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가 "독일만이 유일하게 반대했다"고 밝힐 만큼 바이트만은 이번 결정에서 '왕따'를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았다. 그는 이례적으로 이번 결정에 반대표를 던졌다고 밝히는 한편, "통화정책이 재정정책에 종속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면서 사의 가능성까지 내비쳤다. 바이트만 총재의 스승이자 전임자인 악셀 베버 역시 지난 5월 ECB의 정책에 반발해 자진 사퇴했다.
12일로 예정된 독일 헌법재판소의 유로안정화기구(ESM) 합헌 여부 결정도 ECB 결정의 실효성을 가늠하는 주요 변수다. 현재로선 합헌 예상이 우세하지만 만에 하나 위헌으로 결정이 나면 모든 게 '도로아미타불'이 될 수도 있다. 합헌으로 결정된다 해도 돈줄을 쥔 독일이 어깃장을 놓을 수 있다.
이처럼 우려의 목소리가 들끓자 독일 정부는 "무제한 국채 매입은 ECB의 권한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앙겔라 메르켈 총리), "헌재가 ESM 설립에 합헌 결정을 내릴 것으로 확신한다"(볼프강 쇼이블레 재무장관) 등 적극 방어에 나서는 모양새다.
이다슬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ECB의 국채 매입 결정은 중장기적 방안이 구체화할 때까지 또 한 번 시간을 벌어준 정도"라고 평가했다.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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